[이규화 칼럼] 도·감청, `선수`끼리 목청 높여봤자 바보 된다

2023. 4. 11.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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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화 논설실장

소련 붕괴에 미국의 역(逆)정보가 역할을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으로 날아오는 미사일을 우주에서 요격한다는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스타워즈 계획에 순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두 손을 들었다. 그런데 스타워즈 계획은 사실 당시 공상에 가까웠다.

소련이 자국의 제품과 시장에 대한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는 점을 아는 미국은 엉터리 기술서와 시제품을 소련 스파이가 훔쳐가도록 흘렸다. 소련 가정에서 세탁기, 컴퓨터가 툭하면 멈추는 일이 다반사였다. 농장 한가운데에서는 트랙터가 서버렸다. 소련 해체 후에도 러시아는 미국 CIA의 공작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90년대 러시아 상점의 상품진열대가 텅텅 비었던 풍경과 오버랩 된다. 역정보를 이용해 스파이 행위를 극복하고 공작에 성공한 케이스다.

미국 CIA가 용산 국가안보실 대화를 도청했다는 기밀문서가 해외 언론에 보도되면서 시끄럽다.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 흔들기 호재를 만나 연일 목청을 높이고 있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11일 "외교사에 더는 치욕을 남기지 말고 미국에 즉각적인 항의와 재발방지대책을 공식 요청하라"고 했다. 반면 전날까지 상황파악이 우선이라던 윤 정부는 이날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미국 출장길에 한미 국방장관이 통화한 사실을 밝히며 정보가 상당수 위조됐다는 평가에서 양국이 일치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실은 도·감청 보도는 왜곡된 부분이 많다며 적극적 방어태세로 전환했다. 윤 대통령의 방미 2주를 남겨놓고 도·감청이 악재가 되지 않도록 진화에 나선 것이다.

일각에선 이번 기밀문서 유출에 러시아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미국으로부터 우크라이나에 포탄 제공 부탁을 받고 폴란드로 우회수출 방식을 논의한 게 포함돼 있어서다. 그럴듯하지만 이 역시 확인되지 않는다. 국가간 첩보와 스파이행위에 대해서는 행위국이든 피해국이든 긍정도 부정도 않는 것이 상책이다. 문제를 키워봤자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야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 정부가 정색하고 미국에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저차원적이다. 도·감청은 현실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물론 사실이 확인되면 주권국가로서 항의는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무작정 핏대를 올리면 국제사회로부터 '선수끼리 왜 그래?'라는 조롱을 받기 십상이다. 대신 도·감청 예방과 나아가 우리의 도·감청 능력을 배가해야 한다. 국가간 도·감청, 해킹 등 첩보전은 동맹과 적성국을 가리지 않는다. 오직 국익이 기준이다. 에셜론(Echelon)이라는 세계 최대 통신감청망을 운영하는 정보동맹 '파이브 아이즈'의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조차도 서로 도·감청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번 도·감청의 주체나 경로, 유출정보 등은 파악하기 힘들다. 파악했다고 해도 공개되지 않거나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갈 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에 득 될 게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인데 민주당은 미국 대사를 초치하라는 등 정치공세를 펴고 있다. '용산으로 대통령실을 옮겨서 보안이 뚫렸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한다. 한미동맹을 훼손해온 문재인 정권 때 더 도·감청 대상이 되지 않았을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보안·안보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미국과 정보협력을 더 강화할 것을 주문한다. 러시아(소련)의 첩보능력은 이미 드러났고 중국이 패권국이 되려 하지만 정보전에서 미국을 능가하기 어려워 불가능에 가깝다. 전 세계에 깔려 있는 해저 광케이블의 결절점을 미국이 장악하고 있어서다. 미국은 또 법에 의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 ICT 빅테크들과 정보협력 약정을 맺고 있다. 지구상 어마어마한 공개 정보와 은밀 정보를 미 국가안보국(NSA)이 실시간 분석 처리한다. 일본이 몇 년 전 파이브 아이즈 가입을 타진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도·감청 당하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지만, 이를 역이용할 수 있는 고도의 지능적 전략을 세울 기회이기도 하다. 차제에 미국의 비대칭 첩보역량에 참여해 국익을 극대화하는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선수'끼리 목청 높여봤자 바보만 될 뿐이다.

이규화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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