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의혹 축소하고 야당 비판 집중하며 출구전략 가동하는 대통령실

용산 대통령실 전경. 대통령실 제공

미국 정보기관의 대통령실 도청 의혹과 관련해 대통령실은 11일 한·미 간 “(도청 내용이 담긴) 해당 문건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데 견해가 일치했다고 밝혔다. 미국의 수사 결과가 나오기 전 항의를 포함해 입장을 전달할 계획은 없다고 했다. 엄정 대응을 요구하는 야당에는 “외교 자해행위”라고 화살을 돌렸다. 동맹국의 도청 정황에는 입장을 보류하고 야당 비판에 집중하며 대통령실 도청 의혹 출구전략 가동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도청이란 본질을 외면한 채 논란 진화에만 급급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대통령실은 이날 대변인실 명의 공지에서 “미국 정부의 도·감청 의혹에 대해 양국 국방장관은 ‘해당 문건의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사실에 견해가 일치했다”면서 “굳건한 ‘한·미 정보동맹’을 통해 양국의 신뢰와 협력체계를 보다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을 앞두고 이날 미국으로 출국한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미국 측에 공식 입장을 전달할 계획을 두고 “누군가 위조한 것이니 할 게 없다”면서 “(미국) 자체 조사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의 대화 내용이 미국의 유출 보고서에 담긴 것에 대해 “위조”에 무게를 두면서 공식적 항의 등의 대응을 미룬 것으로 풀이된다.

광범위한 동맹국 도청 의혹으로 난감해진 미국 측과 도청이 사실로 확인된 경우 ‘안보 구멍’ 지적을 받아야 하는 한국 대통령실은 사안을 조기 진화해야 하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특히 도청 사태 파장이 조만간 있을 양국 정상회담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미국의 도청 의혹이 불거진 이후 대통령실의 대응은 하루 단위로 바뀌고 있다. ‘미국과 협의 추진(9일) → 사실관계 파악이 우선(10일) → 상당수 위조 견해(11일)’로 하루 단위로 입장을 밝히며 진화에 힘을 쏟는 분위기다.

대통령실은 유출 보고서에 실린 한국 관련 정보가 왜곡됐을 가능성을 강조하지만 명확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유출된 보고서의 한국 관련 부분이) 맞는지, 과장 내지 조작 가능성이 있는지 등은 우선 팩트(사실관계) 문제를 확실하게 한 다음에 후속조치를 평가하는 게 순서”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 수사로 사실관계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양국 소통을 통해 ‘위조’에 무게를 싣는 공식 대응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대통령실은 사안의 본질인 미국의 핵심 동맹국에 대한 도청 정황에 대해서도 명확한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대통령실은 이날 대변인실 명의로 “용산 대통령실 도·감청 의혹은 터무니 없는 거짓”이라고 밝혔지만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반면 미국 정부는 보고서 유출에 대한 수사를 의뢰하면서 도청을 통해 정보를 수집한다는 사실을 공식 부인하지 않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대통령실의 섣부른 사태 종결 시도는 본질인 도청 정황보다 도청 내용이 담긴 일부 문건의 ‘왜곡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물타기를 하려는 것이란 비판을 불러올 수 있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도·감청 문제가 있었다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지만 한·미동맹은 다른 차원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며 “한·미동맹의 신뢰관계는 굳건하고 그 틀 안에서 도·감청 문제도 사실관계를 파악하면서 필요한 조치들을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저자세 외교’와 ‘용산 청사 보안 미비’ 주장에는 강경한 비판을 이틀째 이어갔다. 대통령실은 이날 공지를 통해 “더불어민주당은 진위 여부를 가릴 생각도 없이 ‘용산 대통령실 이전’으로 도·감청이 이뤄졌다는 식의 허위 네거티브 의혹을 제기해 국민을 선동하기에 급급하다”면서 “이는 한·미동맹을 흔드는 ‘자해행위’이자 ‘국익침해 행위’”라고 강조했다. 여당인 국민의힘도 “민주당이 ‘묻지마 반미선동’을 한다”며 대통령실과 보조를 맞췄다. 주권침해 사안인 외국 정보기관의 대통령실 도청 문제를 국내 정치 이슈로 돌리려 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한·미관계 리스크의 초점을 국내 이슈로 옮겨 사태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는 것이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유설희 기자 sorr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