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꼬이는 한일관계…한미회담 앞두고 고심 깊은 정부
외교당국, 주한일본총괄공사 불러 강력 항의
한일 관계 복원으로 한미일 협력 강화 기대한 정부 `난감`
전문가 "단기간 해결 어려워, 장기적 해법 찾아야"
[이데일리 권오석 기자] 한일 관계가 개선은커녕 또다시 수렁으로 빠지는 분위기다. 지난달 한일정상회담 이후 양국이 갈등을 봉합하는 듯했으나,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외교청서를 발표하면서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이다. 한일 관계 복원을 기점 삼아 한미일 협력 강화를 노력해 온 정부로선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외교부는 11일 일본 정부가 외교청서를 통해 독도에 대한 부당한 영유권 주장을 반복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아울러 주한 일본대사관 총괄공사를 불러 강력히 항의했다. 외교청서는 일본 정부가 매년 발행하는 백서로, 국제 정세 및 일본 정부의 외교활동 등을 기록하고 있다
외교부는 이날 대변인 논평을 통해 “일본 정부가 외교청서를 통해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에 대한 부당한 영유권 주장을 되풀이한 데 대해 강력히 항의하며, 이를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발표된 올해 일본 외교청서에는 지난해에 이어 똑같이 독도 영유권 주장 표현이 담겼다. 외교청서는 “다케시마(竹島·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명칭)는 역사적 사실에 비춰봐도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한 일본 고유의 영토”라며 “한국은 경비대를 상주시키는 등 국제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다케시마 불법 점거를 계속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표현은 2018년 외교청서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6년째다.
외교부는 “앞으로도 정부는 독도에 대한 일본의 어떠한 부당한 주장에 대해서도 단호히 대응해 나갈 것”이라며 “일본 정부는 독도에 대한 부당한 주장을 반복하는 것이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구축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자각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우리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3자 변제` 방식의 강제징용 해법과 관련, 이번 외교청서에서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 계승’ 표명이 누락됐다. 앞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달 한일정상회담에서 “일본 정부는 1998년 10월 발표된 `한일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포함해 역대 일본 내각의 역사인식을 계승한다”고 한 바 있다.
기시다 총리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해 사죄와 반성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일본이 ‘성의 있는 호응 조치’를 보이지 못했다는 지적이 당시에 나왔는데, 이번 외교청서에는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을 계승하겠다는 내용 자체가 빠지면서 오히려 후퇴했다. 강제징용 문제 등 과거사 반성에 대한 일본의 추가적인 호응 조치는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에 대해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을 통해 “일본이 계승하기로 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은 강제징용의 근원인 식민지배 전체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담고 있다”면서 “일본 정부가 동 선언의 정신을 변함없이 계승해 나가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외교부는 이날 오전 구마가이 나오키 주한일본대사관 대사대리(총괄공사)를 외교부 청사로 초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비롯해 강제징용 등 우리 정부의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日 태도 변화 전무…尹정부 정치적 부담만
당초 한일 양국은 정상회담 이후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를 재개하고 화이트리스트(수출 심사 우대국)를 원상회복하기로 하는 등 관계가 정상화 궤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강제징용 문제 관련 일본 피고 기업에 피해 배상 구상권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했던 윤석열 대통령이 `대일 굴욕 외교`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일본과의 관계 복원에 공을 들인 결과다.
하지만 이후 일본이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으면서 윤석열 대통령과 우리 정부만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여기에 일본 현지 언론이 ‘윤석열 대통령이 방일 과정에서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및 오염수 방류 문제를 논의했다’는 내용을 보도하면서, 야권에서는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를 열어야 한다고 벼르는 중이었다. 일본의 일방적인 조치가 국내 여론을 자극, 우리 정부만 정치적 부담을 떠안은 셈이다.
한일정상회담에 이어 이달 말 한미정상회담까지 숨가쁜 일정 속에서 한미일 3각 공조 강화를 기대했던 정부에겐 겹겹이 악재가 쌓이는 실정이다. 북한의 무력 도발이 날로 심각해지는 것은 물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공급망 문제 등 국제 정세가 전반적으로 악화하면서 한미일 간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점이다. 이 와중에 미국 정부가 우리 국가안보실 핵심 관계자의 대화 내용을 도·감청했다는 의혹이 터지면서, 정상회담을 앞둔 한미 양국마저 껄끄러워졌다.
“역사 문제 완전 해결 어려워…관리해 나가야”
전문가들은 한일 양국 간 첨예한 입장차를 단기간에 좁히기는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복잡한 실타래처럼 얽힌 한일 문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일본은 (강제징용 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계속 주장할 것이다. 정권이 바뀌지 않는 한, 역사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건 어렵다. 양국이 관리하는 수준으로 가야 한다”면서 “한일 간에는 역사뿐 아니라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 등 다양한 현안이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다각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창일 전 주일대사는 “우리로선 일본이 지난 정상회담을 통해 대화를 하고 친분도 쌓았기 때문에 자극하지 않기를 기대했겠지만 아니었다”면서 “당시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한다’고 했었는데 누가 계승을 하겠다는 주어가 없지 않았느냐. 외교청서에 관련 내용이 빠지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다. 일본은 (강제징용 문제에 있어) 끝까지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권오석 (kwon0328@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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