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큰일" 대한민국 민낯…문 닫는 소아과, 응급실 '뺑뺑이'
"한국에선 이제 아프면 큰일 난다."
세계적 의료 강국으로 도약한 대한민국. 하지만 정작 2023년 현재 곳곳에서 들리는 민심(民心)은 이렇다. 동네 소아청소년과의원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고, 의사와 손발이 척척 맞아야 할 간호사는 의사와 등진 지 오래다. 또 최근 '응급실 뺑뺑이'(응급실 재이송)로 10대 청소년이 골든타임을 놓쳐 사망하면서 '아파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전 국민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의료계를 달군 뜨거운 감자가 국민의 건강을 볼모로 잡고 있단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멍든 의료계 속 출구를 찾아 헤매는 주요 과제를 짚어본다.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는 지난달 29일 '소아청소년과 폐과와 대국민 작별 인사'란 주제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언급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소아청소년과의원, 쉽게 말해 '동네 소아과'의 결집 단체인 이 의사회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서 소아청소년과의원을 운영하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약 3500명)의 약 90%는 1년 이내 문을 닫거나, 현재의 소아청소년과의원 간판을 내리고 진료과목을 바꿀 예정이라는 것이다.
회원들을 위해 이 의사회는 진료과목을 바꾸고 싶어 하는 회원을 대상으로 전용 트레이닝센터를 곧 개소해 이곳에서 타 진료과목으로 전공을 바꿀 의사들을 빠르면 내달(5월)부터 양성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한 마디로 '전과(轉科) 지망생'을 지원하겠다는 전략이다. 강사진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출신이지만 폐업 후 진료과목을 바꿔 성공한 의사 가운데 선발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내놨다.
소아청소년과의 의사·의원 수 부족은 현실화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 전국 소아청소년과 수련병원의 전공의 모집률은 15.9%로 최저치를 찍었다. 빅5 병원(서울대병원·서울아산병원·삼성서울병원·세브란스병원·서울성모병원) 가운데 1차 모집에서 정원을 다 채운 곳은 서울아산병원뿐이었다. '동네 소아과' 부족 현상은 농어촌에서 심화하고 있다.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전국에서 문을 닫은 소아과는 660여 곳으로, 연평균 130여 곳에 달했는데 대부분 농어촌에 집중됐다. 또 전국 기초단체 226곳 가운데 58곳에서 소아과가 사라졌다.
이에 4일 환자단체연합회는 성명을 내고 "현행 응급의료 체계에선 응급의료기관의 인력·병상·장비 등에 관한 정보도 실시간으로 제공되지 않아 중증 응급환자의 경우 구급대원이 일일이 개별 응급의료기관에 전화해서 수용 가능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고 지적하며 "119구급대가 응급환자를 이송할 응급의료기관을 신속히 선정하기 위해 응급의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게 해달라"고 정부에 제안했다.
A양뿐 아니라 지난 5년간 심근경색이나 뇌졸중 등이 발생한 중증 응급환자 절반이 적정 시간 내에 응급실에 도착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11일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이 국립중앙의료원으로부터 제출받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2년까지 145만명의 중증 응급환자 중 49.1%인 약 71만 명이 적정 시간 내에 응급실에 도착하지 못했다. 최혜영 의원은 "속칭 '응급실 뺑뺑이' 사건으로 온 국민이 대한민국 응급의료 체계를 우려하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응급의료에 재정지원을 쏟아가며 골든타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응급실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는 환자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앞서 3월 보건복지부는 제4차 응급의료 기본계획을 통해 '응급의료서비스의 재도약으로 전국 어디서나 최종 치료까지 책임지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또 당정은 지난 5일 일명 '응급환자 구급차 뺑뺑이 사망사건' 재발을 막기 위해 "전국 어디서나 1시간 이내에 접근할 수 있도록 중증 응급의료 센터를 현재의 40개소에서 60개소로 확충하는 계획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5일 국회에서 열린 '소아·응급·비대면 의료 대책 당·정 협의회'를 마친 직후 브리핑을 통해 "당정은 (관련 사고에 대한) 엄정한 진상조사를 통해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그에 상응하는 조치와 제도 개선을 마련해 나가기로 뜻을 같이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당은 정부가 지난 3월에 발표한 응급의료 기본 계획 중에서 응급실 사건과 관련한 정책 과제들을 신속하고 강력하게 추진할 것을 주문했다"며 "중증 응급의료센터를 수술 입원 등 최종 치료가 가능하도록 규정을 개편하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이날 나온 중재안에 따르면 당정은 간호법의 명칭을 '간호사 처우 등에 관한 법률'(간호사 처우법)로 바꾸자고 제시했다. 이와 함께 간호법 제정안 제1조에서 '지역사회' 문구를 삭제하고, 간호조무사의 학력 요건을 '특성화고 이상'으로 변경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간협 관계자들은 크게 반발하며 간담회가 종료되기 전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들은 "이미 합의된 내용에 대해 수정하려고 한다"며 "자리 자체가 불공정하다. 간호법을 반대하는 사람들만 모아놓고 회의했다"고 항의했다.
간호사들이 간호법 제정에 절실한 데는 3년 후 예고된 '초고령화 사회 진입'과 맞물린다. 고령의 만성질환 환자가 늘면서 '병원 밖' 즉, 지역사회에서 확대될 간호사의 역할을 법적으로 보호받기 위해서다. 현행 의료법은 의료기관(병원) 중심이어서 간호사가 지역사회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간호행위로 포함하지 않고 있다.
또 최근 불거진 불법 간호사인 'PA 간호사'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간호사의 업무 범위를 선명하게 하려는 취지가 간호법에 녹아 있다. 10일 서울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자처한 김영경 대한간호협회장은 "간호법은 부모돌봄법, 존엄돌봄법, 국민행복법을 지향하며 선진 의료시스템 구축의 토대를 마련하자는 대국민 호소이자 법안 그 자체"라며 간호법 통과를 촉구했다.
하지만 의사를 비롯한 13개 직역의 단체인 보건복지의료연대는 "지역사회에서의 간호사 업무를 인정하는 순간 간호사가 의사의 지시 없이도 단독 개원할 수 있고, 임상병리사·간호조무사·응급구조사 등 타 직역의 업무 권한을 침범할 법적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라며 강력히 반발해왔다. 보건복지의료연대는 13일 간호법이 국회에서 통과하면 16일 서울 시청 앞에서 총궐기대회를 열고, 파업도 불사하겠다고 예고한 상황이다.
그간 의사 단체는 2000년 '의약분업 반대'와 2014년 '원격의료 반대', 2020년 '의대 정원 확대 등 4대 의료정책 반대'를 주장하며 파업을 진행한 바 있다. 파업의 최대 피해자는 단연 '환자'다. 2020년 파업 당시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파업은 곧 전공의들이 환자들의 치료를 중단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투병 중인 환자들이 치료받지 못하면 질병이 악화하거나 생명이 위태로워진다"고 호소했다.
간호법 제정을 둘러싼 각 직역 간의 불협화음에 대한 원로의 충고도 나왔다. 전(前) 순천향의대 예방의학교실 박윤형 교수는 "사실 병원 현장에선 의사와 간호사의 협력에 문제가 없지만 간호법 등 정책적 이슈가 확산하면서 두 직역 간 갈등·투쟁 구도가 프레임화하고 있어 안타깝다"면서도 "국민 건강이 우선인 만큼 의사와 간호사 단체가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정심교 기자 simky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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