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CIA가 확인시켜준 ‘윤석열 리스크’
박민희ㅣ논설위원현실은 첩보영화보다 더 냉혹하고 극적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한국 외교안보 최고위 당국자들이 미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요청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도청해 미 국방부에 보고했다. 누군가 이 기밀문서를 몰래 찍은 사진 파일을 온라인에 퍼뜨렸고, 전세계가 한국 국가안보실의 대화를 생생하게 ‘엿듣게’ 되었다.
3월 초, 이문희 당시 외교비서관은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에게 미국에 제공하는 포탄이 우크라이나로 갈 가능성이 있다면서, “한국이 명확한 입장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해 이 문제를 압박할 것을 우려한다”고 말한 것으로 문서에 등장한다고 <뉴욕타임스> 등은 보도했다.
이들은 왜 한미 정상통화를 걱정했을까. 윤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한국의 원칙을 일관되게 밝힌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미국 국빈방문을 한껏 기대하고 있는 윤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에 포탄 지원하겠다. 책임은 내가 진다”고 덜컥 약속해버리는 상황을 예상한 것 아닐까. 일제 강제동원 피해와 한일관계에 대해, 외교안보 당국자들이 ‘성급한 해법’을 만류했는데도 윤 대통령이 “결단”으로 포장해 밀어붙인 것을 떠올려보자. 윤 대통령의 독단은 이제 한국 외교의 ‘핵심 리스크’다.
그나마 ‘신중론’을 폈던 김성한 실장과 이문희 비서관 등은 지난달 말 ‘블랙핑크 공연 무산’이라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모두 물러났다. 이제 국가안보실의 막강 실세는 김태효 1차장이다. 외교가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하루에도 대여섯번 김태효 1차장을 독대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이명박 정부에서 한일 안보 협력을 과속으로 밀어붙이다 물러났던 김태효 1차장은 이번에는 훨씬 더 멀리 나아가고 있다. 한일 정상회담 뒤인 3월18일 그는 <와이티엔>(YTN)에 출연해, “일본과 무엇을 주고받는 협상을 원하지 않는다”며 일본이 “학수고대하던 해법”을 먼저 제안했음을 거침없이 밝혔다. 그러면서, “미국을 포함해 글로벌 사회가 2018년도(에는) ‘한국이 과거와 다른 행보를 보인다’ 이렇게 생각했었다면, 지금은 한국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명분상 ‘국제사회에서 새로 태어났구나’ 이런 느낌을 갖게 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보여준 ‘윤석열-김태효 외교 독트린’은 이런 것이다. 우선, 문재인 정부 외교 정책에 대한 무조건 반대(ABM)가 중요한 기준이다. 둘째, 그가 한국 여론을 설득하러 나온 자리에서도 계속 일본과 미국을 향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는 미국·일본과 엇나가는 외교를 했지만, ‘새로 태어난’ 윤석열 정부는 미·일이 믿을 수 있는 외교를 하겠다는 다짐이다. 셋째, ‘신중론’은 배제되고 김태효 1차장의 강경론을 대통령이 ‘내가 책임진다’고 밀어붙이면서, 한국 외교의 안전 장치가 무너지고 있다. 넷째, 미·일은 이제 남이 아니니 치열하게 밀고 당겨 ‘주고 받는’ 외교 대신, 대통령 부부의 의전과 행사가 중심이 되는 ‘외교의 사유화’가 벌어진다.
미국·일본의 국익에 한국의 국익을 일체화시킨 반작용으로 대중국 외교 실종도 더욱 심해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나타난 제국주의적 위협을 보며 많은 나라들이 미국과 안보 협력을 강화하면서도, 동시에 미국의 보호주의·일방주의를 경계하면서 복합적 외교를 펼치는 것과 동떨어진 흐름이다.
일본 외교라도 한국이 제대로 따져봐야 한다. 지난 1~2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이 중국을 방문해 대만 해협과 동중국해에서 중국의 긴장 고조 행위를 비판하고, 중국이 스파이 혐의로 붙잡고 있는 일본인 석방을 요구했다. 표면적으로는 구체적 결실 없이 이견이 팽팽했다. 하지만, 리창 총리, 왕이 중앙정치국 위원, 친강 외교부장 등 중국 외교의 최고위 인사들이 모두 하야시 외무상을 만나 장시간 의견을 주고 받았다. 중국이 경제 회복을 위해 대외 환경을 개선하려는 의도를 파고들면서, 일본은 중국과의 관계를 관리하고 기회를 확대하려 한다. 일본은 미국의 핵심 동맹으로 국제적 위상을 강화하면서도, 여러 방향으로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다.
북핵·미사일 문제가 심각할수록 한국도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 정책을 완전히 포기한 것인지, 중국을 통해 북한을 움직일 여지는 있는지, 전략적 탐색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대중국 무역적자 급증은 자급자족을 강조하는 중국의 정책 변화가 주요 원인이지만, 한중관계를 관리해 충격을 줄여야 한다. 대만해협 위기 가능성도 직접 판단하고 대비해야 한다. 지금 한국 외교에 전략은 있는가. 미국과 일본을 따르면 한국의 난제들이 해결된다는 것이 국가 전략일 수는 없다.
김태효 1차장은 11일 미국을 방문해 한미 정상회담 의제를 최종 조율한다. 이번에도 ‘주고 받는 협상’ 없이,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 사안에서 미국이 “학수고대하던” 과감한 양보를 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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