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사로 보는 세상] '두창'과 잉카 문명의 멸망...분분한 해석과 교훈
● 역사 해석이 달라지는 여러 사례들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맞서 싸운 계백의 백제군은 백제에게는 충신이지만 신라에게는 반드시 쳐부수어야 하는 적군이었다. 단종에게는 사육신이 목숨을 건 충신이지만 세조에게 사육신은 죽이지 않으면 두고두고 문제가 될 적에 불과했다. 반대로 한명회는 세조에게 충신이지만 단종에게는 천하의 역적이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역모에 의해 물러난 후 그 역모를 성공한 이들이 ‘종’과 ‘조’가 아닌 ‘군’으로 격하하는 명칭과 함께 당시의 기록을 왕조실록에 남겼으므로 조선시대 27명의 임금 중에서는 대표적인 나쁜 임금 2명으로 남게 되었지만 그와 다른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미국 독립전쟁을 이끈 사령관으로 승리 후 초대 대통령에 오른 조지 워싱턴이 영국을 상대로 목숨을 건 독립전쟁을 한 것은 식민지인 미국인들의 독립 염원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영국 정부의 정책이 땅을 넓히기에 불리했으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는 견해도 있다.
1812년에 약 6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간 나폴레옹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한 것은 세계사 책에서 작전 실패와 추위 때문이라고 흔히 이야기하지만 의학 역사에서는 프랑스를 출발할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발진티푸스로 인해 출발과 동시에 환자가 발생하면서 입은 전투력 손실이 가장 큰 원인이라 이야기한다. 이와 다르게 소수의견으로는 프랑스군의 경우 장교들만 꼬냑을 마셨지만 러시아군은 장교와 일반병이 모두 보드카를 즐김으로써 추위에 훨씬 잘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 하기도 한다.
1518년부터 1521년 사이에 아즈텍(아스테카) 문명이 멸망하는 과정에서는 두창(천연두)의 유행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고 의학 역사책에 잘 나와 있다. 미국에서는 지오그래피 채널에서 아즈텍 문명의 멸망과 관련하여 다큐멘타리를 제작하는 등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아즈텍 문명 멸망에 대해 학자들이 쓴 글 중에는 아예 감염병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의 차이는 잉카문명의 멸망에서도 나타난다. 그것도 세계적인 석학 두 분이 다른 해석을 내놓아서 더 큰 흥미를 느낄 수 있다.
● '전염병과 세계사'에 나타난 윌리엄 맥닐의 설명
세계적인 역사학자 윌리엄 맥닐은 '전염병과 세계사'에서 잉카문명의 멸망 과정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1519년에 아즈텍문명지인 멕시코에서 유행하여 아즈텍문명의 멸망에 큰 역할을 한) 두창은 1520년에 과테말라로 퍼져 나갔고, 계속 남하하여 1525년 또는 1526년에 잉카제국까지 침범했다. 그 결과는 아즈텍에서 일어났던 것만큼이나 극적인 것이었다. 당시 잉카제국의 왕은 수도를 벗어나 북쪽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도중 천연두로 죽었고, 왕위 계승자마저 사망해 적통을 이을 후계자가 없어져 버렸다. 결국 내란이 일어나 잉카제국의 정치구조가 결정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피자로와 그 일당이 쿠스코에 도착해 보물을 약탈해 갔다. 이들은 이렇다 할 군사적 저항도 받지 않았다”
이상은 잉카문명의 멸망 과정이다. 맥닐은 잉카문명의 멸망을 포함하여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스페인에게 쉽게 정복당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감염병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 역사적으로 두창에 노출될 기회가 많았던 스페인인들은 어느 정도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잉카인들을 비롯한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처음 만난 두창에 면역이 전혀 없었으므로 피해가 훨씬 컸기 때문이라 했다.
두창뿐 아니라 1530-31년에는 멕시코와 페루에 홍역이 전파됐고, 1546년에는 발진티푸스로 생각되는 병이 유행하는 등 인디언들이 경험하지 못한 전염병이 수시로 유행한 것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맥닐의 설명은 잉카문명 정복과정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므로 내용을 더 상세히 추가하면 아래와 같다.
‘태양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잉카의 황제 후아이나 카팍(Huayna Cápac)은 후계자인 니난 쿠요치(Ninan Cuyochi)와 함께 북부 지역을 시찰하고 있었다. 이 때는 이미 잉카제국에 두창이 전파된 후였으며, 퀴토(Quito)를 방문하고 있을 때 수도 쿠스코(Cusco)에서 찾아온 전령이 두창이 번져 많은 왕족과 시민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쿠스코로 방향을 돌렸으나 돌아가는 길에 두창에 걸리고 말았다. “내 아버지 태양이 부르는 곳으로 간다. 얼른 가서 그 옆에서 쉬어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은 1527년경이었다. 황태자인 니난 쿠요치도 황제가 세상을 떠난 시기 전후에 두창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상을 떠난 황제에게는 니난 쿠요치 외에 이복형제인 후아스카르(Huáscar)와 아타후알파(Atahualpa)가 있었다. 왕위에 오른 후아스카르는 아타후알파에게 퀴토의 통치를 맡겼다.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던 아타후알파는 1529년부터 수시로 전투를 벌이면서 잉카제국을 차지하기 위한 패권 경쟁을 벌였다.
1532년이 되자 전세는 아타후알파에게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양쪽 모두 약 6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맞붙은 전투에서 아타후알파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고, 후아스카르는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이 때는 잉카제국에서 두창으로 사망한 사람이 이미 10만 명을 넘은 후였다.
그랬으니 피자로(Francisco Pizarro)가 이끄는 스페인 군대가 잉카제국에 도착했을 때 제대로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아타후알파는 후아스카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1533년 7월에 스페인인들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잉카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 ‘총, 균, 쇠’에 나타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설명
문명연구에 대해 세계적인 석학인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기술한 내용을 중심으로 잉카문명 멸망과정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전투에서 총을 이용하여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1532년 11월 16일 잉카 황제 아타후알파와 스페인군대가 고지대 도시인 카하마르카에서 마주친 사건이었다.
피자로는 62명의 기병과 106명의 보병 등 168명이라 하지만 제대로 훈련된 병사라고 하기는 어려운 스페인 군대를 이끌고 약 8만 명의 잉카인들과 맞섰다. 숫자는 많지만 잉카인들도 오합지졸임은 마찬가지였다. 전투를 하겠다는 생각이 거의 없었으므로 잉카인들은 무기도 챙기지 않고 스페인 군대를 맞이하러 왔다.
피자로는 잉카인 몇 명을 잡아 고문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했다. 멀리서 본 잉카인들의 숙영지는 아름다운 도시처럼 보였으므로 피자로는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하지 않도록 독려하느라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했다. 아타후알파가 보내 온 전령에게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만나 친구로 지내자고 해 놓고는 카하마르카 광장 주변에 병사들을 숨겨 놓았다.
아타후알파의 신하들은 그를 완전히 둘러싼 후 끝도 모를 행렬을 이루고 다가왔다. 가장 앞에서는 약 2000명이 황제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쓸었고, 전사들이 뒤를 따랐다. 아타후알파는 약 80명의 신하들이 어깨에 맨 가마를 타고 있었고, 이 신하들은 화려하고 푸른 제복을 입고 있었다.
이 때만 해도 분위기는 평화협상에 가까웠다. 피자로의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지만 말이다. 피자로는 전령을 보내 아타후알파에게 예수의 가르침에 복종하라면서 성경책을 내밀었다. 성경이 뭔지 알리 없는 아타후알파는 성경을 펴기 싫어서 전령의 팔을 때렸다.
이 직후 피자로는 신호를 보내 전투에 들어갔다. 숨겨 둔 기병과 보병이 쏟아져 나왔으며, 잉카인들은 처음 듣는 우렁찬 총소리와 요란한 나팔소리로 인해 크게 놀랐다. 어쩔 줄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스페인인들은 마구 칼을 휘둘렀다. 잉카인들은 서로 짓밟고 올라가다 질식해 죽었으며, 무장을 하지 않았으니 아무리 수가 많다 해도 스페인인들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피자로는 아타후알파를 포로로 잡은 후 8개월 동안 역사상 가장 많은 몸값을 뜯어냈다. 가로 6.7m, 세로 5.2m, 높이 2.4m가 넘는 방을 가득 채울 만큼 황금을 받은 후에 나중에 풀어준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아타후알파를 처형해 버렸다.
잉카족이 태양신으로 숭배하는 존재인 아타후알파는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사로잡힌 상태에서 내리는 그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했다. 아타후알파가 처형된 후 스페인군대와 잉카인들의 싸움이 벌어졌지만 잉카인들은 이미 후원군들이 도착한 스페인군대를 당할 수 없었다. 이것으로 잉카문명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 잉카문명 멸망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윌리엄 맥닐은 두창의 유행에 의해 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내란이 일어난 것이 피자로의 군대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잉카문명이 멸망한 원인이라 했다. 그러나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역사에서 균의 역할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잉카문명의 멸망에서는 총소리를 처음 경험한 잉카인들이 그 소리에 놀라서 우왕좌왕하다 서로 밟혀 질식해 죽은 것과 무기도 가져가지 않는 등 전쟁에 대한 대비가 너무 없었던 것이 원인이라 했다. 의학역사책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두창의 유행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날 때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원인인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강조하고 싶은 점은 자신이 아는 것을 우기기 전에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이 모르고 있는 내용을 접하게 되는 경우 그 내용을 더 공부하여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에 추가하고, 끊임없는 연구와 지식습득을 통해 더 나은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계속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전문가라 하더라도 모든 자료를 다 섭렵할 수는 없으므로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는 경우 다른 연구자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자칫 자신이 충분히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전문가의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지식과 다른 새 이론이 등장하면 이것이 어떤 자료를 토대로 제시된 것인지, 그 자료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닌지를 확인해 자신의 지식을 보강해야 한다.
중세가 멸망한 것은 이슬람세력이 강화하면서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탐불)을 점령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페스트의 유행, 르네상스 정신의 발전 등 다양한 이유가 제기될 수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의견이 달라질 수 있다.
마야문명, 아즈텍문명과 함께 아메리카 3대 문명이라 할 수 있는 잉카문명이 몰락함으로써 유럽인들의 아메리카대륙 지배가 본격화했다. 잉카문명 멸망에는 두창의 유행과 총의 위력이 큰 역할을 했으며, 이복형제끼리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내분, 스페인군대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지 않고 평화협상을 하려한 판단미스와 전쟁준비 부족 등 다양한 이유를 들 수 있다.
※ 참고문헌
1. 윌리엄 맥닐. 전염병의 세계사. 김우영 역. 이산. 2005
2. 재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김진준 역. 문학사상. 2005
3. Donald R. Hopkins. The Greatest Killer: Smallpox in Histor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2
4. George C. Kohn. Encyclopedia of Plague and Pestilence. Wordworth Reference. 1995
※필자소개
예병일 연세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C형 간염바이러스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대학교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에서 전기생리학적 연구 방법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했다.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16년간 생화학교수로 일한 후 2014년부터 의학교육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경쟁력 있는 학생을 양성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평소 강연과 집필을 통해 의학과 과학이 결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학문이자 융합적 사고가 필요한 학문임을 소개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감염병과 백신』, 『의학을 이끈 결정적 질문』, 『처음 만나는 소화의 세계』, 『의학사 노트』, 『전염병 치료제를 내가 만든다면』, 『내가 유전자를 고를 수 있다면』, 『의학, 인문으로 치유하다』, 『내 몸을 찾아 떠나는 의학사 여행』, 『이어령의 교과서 넘나들기: 의학편』, 『줄기세포로 나를 다시 만든다고?』, 『지못미 의예과』 등이 있다.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의학교육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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