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열정의 콘서트를"…고현미, 눈물의 발인식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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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현미가 영면에 들었다.
세상과 작별을 고하는 날, 가족은 물론 수많은 동료들이 모여 안타까움 속에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이날 100여 명의 가족과 연예계 선후배 동료들이 참석했다.
"많은 분들이 슬픔 속에 있다. 현미와 작별하기 위해 그녀를 아껴주시던 많은 분들이 함께 모여주셨다"고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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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patch=오명주기자] “100세까지 노래하고 싶다 하셨는데…”
가수 현미가 영면에 들었다. 세상과 작별을 고하는 날, 가족은 물론 수많은 동료들이 모여 안타까움 속에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현미의 영결식이 11일 오전 9시 서울 동작구 흑석동 중앙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 이용식이 이날 사회를 맡았다. 영결식이 끝난 뒤 발인 및 운구가 이뤄졌다.
이날 100여 명의 가족과 연예계 선후배 동료들이 참석했다. 조카 한상진과 노사연, 이자연 대한가수협회 회장, 이용식, 박상민, 알리, 설운도, 김흥국, 하춘화, 이찬원 등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날 이용식이 영결식 사회를 맡았다. “많은 분들이 슬픔 속에 있다. 현미와 작별하기 위해 그녀를 아껴주시던 많은 분들이 함께 모여주셨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현미 누님의 데뷔 70주년 콘서트는 하늘나라 천국에서 송해 선배님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열릴 거라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이자연 회장이 조사를 맡았다. “노래 제목처럼 떠날 때 한 마디 말씀도 없이 떠나가셨다. 선배님의 호탕한 그 웃음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허탈해했다.
그녀의 생전을 회상했다. “선배님의 무대는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뜨거운 열정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현역이라는 자리를 굳건히 지켜내셨다”고 말했다.
황망하게 떠난 그녀에 애통함도 전했다. “늘 100세까지 노래하고 싶다고 70주년 기념 콘서트도 하고 싶다고 하셨지 않나. 그 멋진 계획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고 털어놨다.
마지막으로 “영원히 잊지 않겠다. 가장 아름답고 큰 별이 되어서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셔라. 남은 열정과 못다한 꿈은 하늘나라에서 꼭 이루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박상민도 앞장서 애도의 뜻을 전했다. “여든이 가까운 연세에도 최근까지 활동하시는 모습을 봐서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대스타이자 닮고 싶은 선배님이셨다”고 말했다.
알리도 “선배님의 가요계 업적을 후배들이 본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깊이 있는 목소리 온몸을 뒤덮는 울림, 저 역시 가수로서 선배님의 열정을 닮고 싶다”고 덧붙였다.
발인은 엄숙하고 경건하게 이뤄졌다. 참석자들은 이날 조가로 고인의 히트곡 중 하나인 ‘떠날 때 말없이’를 조용히 불렀다. 헌화가 시작됐고, 많은 이들이 눈물을 쏟아냈다.
식이 끝나자, 고인이 잠들어 있는 관이 운구됐다. 조카 한상진이 영정을 들었다. 현미의 조카인 노사연과 노상봉도 뒤따랐다. 모두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현미는 지난 4일 별세했다. 서울 이촌동 자택에서 쓰러졌다. 팬클럽 회장이 그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고인은 1957년 3인조 걸그룹 ‘현시스터즈’로 데뷔했다. 1962년 1집 ‘밤안개’를 시작으로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 없이’, ‘애인’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고인은 작곡과 故 이봉조와 결혼해 슬하 두 아들을 뒀다.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 후 두 아들이 있는 미국에 묘지가 조성될 예정이다.
<사진=송효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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