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 블랙홀, ‘560만㎞ 폭주’하면서 아기 별무리 쏟아냈다 [영상]

곽노필 2023. 4. 1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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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2천만배 블랙홀이 은하 중심서 탈출
음속 4500배로 날아가며 주변 가스 압축
지나간 자리에 20만광년 아기별무리 생겨
은하의 중심을 탈출한 초거대질량 블랙홀이 은하계를 질주해 가는 장면 상상도. 블랙홀이 앞에 있는 가스를 압축하면서 뒤쪽에서 아기별(푸른색) 무리가 탄생하고 있다. 허블우주망원경이 관측한 20만광년 길이의 항적운을 토대로 그린 그림이다. NASA, ESA, Leah Hustak(STScI) 제공

‘우주의 무덤’에서 ‘우주의 요람’으로.

주변의 모든 물질을 빨아들여 ‘우주의 무덤’으로 불리는 블랙홀이 별의 탄생을 촉진하는 ‘우주의 요람’ 역할을 하는 새로운 관측 결과가 나왔다. 추가 관측을 통해 50년 전에 등장한 ‘폭주 블랙홀’ 이론을 증명하는 사례가 될지 주목된다.

블랙홀은 연료를 소진한 거대한 별이 마지막에 중력붕괴하면서 만들어지는 고밀도 천체다. 강력한 중력의 힘으로 빛조차 가둬두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검은 괴물이다. 태양이 블랙홀이 된다면 크기가 반지름 3km로 작아진다. 

그런데 태양의 2천만배에 이르는 초거대질량 블랙홀이 어떤 이유에서인가 자신의 보금자리인 은하의 중심을 탈출해 은하계 사이를 폭주하면서, 마치 항공기가 만드는 길다란 항적운처럼 아기별 무리를 만드는 모습이 포착됐다. 블랙홀이 지구에서 달까지 14분에 갈 수 있는 시속 560만㎞(음속의 4500배)의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면서 만든 아기별 무리의 길이는 무려 20만광년에 이른다. 우리 은하의 2배 크기다.

허블우주망원경이 우연히 포착한 이 폭주 블랙홀은 여느 블랙홀처럼 강력한 중력으로 별들을 집어삼키는 대신, 앞에 놓여 있는 가스를 헤집어가면서 새로운 별 탄생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속도가 워낙 빨라 물질을 집어삼킬 틈조차 없었던 셈이다.

허블우주망원경이 관측한 사진. 네모 안에 있는 줄무늬가 20만광년 길이의 항적운이다. 줄무늬 왼쪽 아래에 초거대질량 블랙홀이 있고, 오른쪽 위 끝에 블랙홀이 탈출한 은하가 있다. NASA, ESA, Leah Hustak(STScI) 제공

3개 블랙홀이 펼친 우주 당구 게임

나사(미국항공우주국)는 관측 내용을 설명하는 자료에서 “3개의 거대한 블랙홀이 서로 밀치고 충돌하는 은하계 당구 게임이 벌어진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국제학술지 ‘천체물리학저널 레터스’(Astrophysical Journal Letters)에 발표된 이번 연구를 이끈 예일대 피터 바 도쿰(Pieter van Dokkum) 교수(물리학)는 “배가 물을 가르면서 항적을 남기듯 블랙홀이 우주에 항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며 “밝기가 블랙홀이 원래 속해 있던 은하의 절반 정도인 것으로 보아 새로운 별들의 무리임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허블망원경이 찍은 사진에서 블랙홀은 대각선으로 길게 뻗어 있는 줄무늬의 왼쪽 끝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맨끝에는 이온화한 산소 가스 덩어리가 아주 밝게 빛나고 있다. 연구진은 이는 초음속으로 이동하는 블랙홀과 부딪히면서 가열된 가스이거나 블랙홀 주변의 강착원반에서 방출하는 방사선일 것으로 추정했다. 강착원반은 블랙홀의 영향으로 주변 물질들이 원반 형태로 맴돌면서 응축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번 발견은 아주 우연히 이뤄졌다. 반 도쿰 교수는 “허블우주망원경으로 지구로부터 75억광년 떨어져 있는 왜소 은하 RCP-28에서 구상 성단을 찾고 있던 중 가느다란 줄무늬를 발견했다” 며 “처음엔 우주방사선이 카메라 검출기에 부딪혀 생긴 인공적인 이미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주방사선을 제거한 후에도 줄무늬는 여전했다. 이전엔 본 적이 없는 현상이었다. 연구진은 분광법을 이용해 분석한 끝에 블랙홀이 은하의 중심을 둘러싸고 있는 가스 덩어리를 뚫고 지나간 흔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3개의 블랙홀이 시차를 두고 충돌하며 은하 중심을 탈출하는 과정을 그린 개념도. van Dokkum 제공

1천만년 간격으로 두 차례 블랙홀 충돌한 듯

이 블랙홀은 어떻게 해서 기존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행태를 보이게 됐을까?

연구진에 따르면 이는 초거대질량 블랙홀의 다중 충돌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연구진은 처음 두 은하가 5천만년 전에 합쳐지는 사건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 결과 두 은하의 중심에 각각 초거대질량 블랙홀이 생겨났고, 두 블랙홀은 짝을 이뤄 서로를 공전했다.

그 뒤 4천만년 전 초거대질량 블랙홀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은하가 나타났다. 3개의 블랙홀이 뒤섞여 3자간의 역학 관계가 혼란스러워지면서 블랙홀 중 하나가 다른 두 블랙홀의 추진력을 빼앗아 은하의 중심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원래부터 있던 두 은하는 그대로 남아 있었을 수도 있고, 새로운 침입자 블랙홀이 둘 중 하나를 대체하고 이전 동반자를 쫓아냈을 수도 있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50년 전 ‘폭주 블랙홀’ 이론 증명될까

한 블랙홀이 한 쪽으로 방향을 틀면, 다른 두 블랙홀은 반대쪽으로 향하게 된다. 연구진은 은하의 반대쪽에서 두개의 블랙홀이 폭주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이 보인다고 밝혔다. 은하의 중심에 활성 블랙홀이 남아 있는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런 추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황 증거다.

연구진은 제임스웹우주망원경과 찬드라 엑스선 망원경의 후속 관찰을 통해 좀 더 확실한 설명이 이뤄질 수 있기를 기대했다. 반 도쿰 교수는 “확인될 경우 초거대질량 블랙홀이 은하를 탈출할 수 있다는 최초의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또 2026년께 발사할 예정인 낸시그레이스로먼우주망원경(RST)을 통해 우주의 다른 곳에서도 ‘별 줄무늬’를 찾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 망원경은 허블 수준의 해상도로 허블보다 100배 더 넓은 우주를 한번에 포착할 수 있다.

*논문 정보

DOI 10.3847/2041-8213/acba86

A Candidate Runaway Supermassive Black Hole Identified by Shocks and Star Formation in its Wake

The Astrophysical Journal Letters(2023)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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