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의 사이언스카페 | 200년 만에 밝혀진 베토벤의 死因] 머리카락에서 간 질환 유전자 확인, 조상 중 불륜 증거도 찾아
악성(樂聖)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의 사인(死因)이 200년 만에 밝혀졌다. 유전적 요인과 과도한 음주, 간염 바이러스 감염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간이 손상됐다는 것이다.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요하네스 크라우스(Johannes Krause) 교수와 벨기에 뢰번가톨릭대의 토마스 키비실드(Toomas Kivisild) 교수 연구진은 “독일 작곡가 베토벤의 머리카락에서 유전자가 담긴 DNA를 추출해 분석한 결과 사인이 간 경변으로 밝혀졌다”고 3월 23일(현지시각)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에 밝혔다. 논문 제1 저자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박사과정의 트리스탄 베그 연구원이다.
간 질환 유전자와 과도한 음주 겹쳐
그동안 베토벤의 머리카락과 두개골에서 유전물질을 추출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최근 20년간 DNA 분석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하면서 몇 백 년 된 DNA도 해독할 수 있게 됐다. 연구진은 베토벤의 머리카락으로 알려진 시료 8점에서 유전물질을 추출해 분석했다. 한 시료에서는 인간 유전물질 중 거의 3분의 2를 추출했다. 분석 결과 체코 출신의 작곡자이자 피아노 연주자인 이이그나츠 모셸레스가 소장했던 머리카락을 포함해 5점은 베토벤 가계 기록과 일치하는 유럽 남성 한 명의 것으로, 베토벤 생애 마지막 7년간 채취된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진은 유전자 해독 결과와 출처 정보 등을 종합하면 베토벤의 진짜 머리카락이 거의 확실하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유전자에서 질병과 관련된 부분을 조사했다. 크라우스 교수는 “우리 연구의 목표는 원래 베토벤의 청력 상실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베토벤은 20대부터 귀가 나빠지기 시작해 1818년 청력을 완전히 잃었다. 하지만 연구진은 청력 상실의 원인은 확인하지 못하고 다른 질병과 관련된 유전 정보를 찾아냈다. 베토벤은 DNA에 PNPLA3 변이 유전자가 있었다. 이 유전자는 간 경변과 관련 있다. 또한 유전적 혈색소증을 유발하는 HFE 변이 유전자도 발견했다. 혈색소증은 유전적인 원인으로, 음식을 통해 섭취한 철이 너무 많이 흡수되는 질환이다. 철이 과도하게 축적되면 간과 심장, 췌장이 손상된다. 베그 연구원은 “기록에 따르면, 베토벤은 술을 많이 마셨는데 특히 죽기 직전에 더 심했다”며 “과도한 음주가 간 손상을 더 악화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베토벤 DNA에서는 B형 간염 바이러스 유전자도 나왔다. 연구진은 베토벤이 언제 어떻게 간염 바이러스에 감염됐는지는 밝히지 못했다.
연구진은 바이러스가 베토벤의 몸에 잠복하고 있다가 죽기 몇 달 전 다시 활동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베토벤의 병세를 담은 기록과도 일치한다. 그는 1826년 12월 건강이 급속히 나빠지면서 황달이 생기고 팔다리가 부풀어 올랐다. 이는 모두 간이 손상됐을 때 나타나는 증세다. 베토벤은 자리에 누워 1827년 3월 사망할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이번 연구는 베토벤 가문의 숨겨진 비밀도 밝혀냈다. 연구진은 벨기에에 살고 있는 베토벤 후손들의 유전자를 분석했는데,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일부는 1500년대 후반과 1600년대 초 부계 조상과 유전자를 공유했지만, 베토벤 머리카락에 나온 남성 Y염색체와는 달랐다. 연구진은 베토벤 부계 직계 조상에서 최소 한 차례 혼외 출산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공동 저자인 뢰번대의 마틴 라무소 교수는 “DNA 정보와 기록을 종합해보면 베토벤의 법적·생물학적 가계에서 불일치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납중독설 증거였던 머리카락은 가짜
과학계는 이번 결과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학 의대의 법분자생물학자인 월터 파슨 교수는 ‘네이처’에 “위대한 기술적 성과”라고 평가했다. 파슨 교수는 2007년 유전자 분석을 통해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스 2세의 자녀 두 명을 확인한 바 있다. 오스트리아 빈대학의 법의학자인 크리스티안 라이터 교수는 “시료에서 유전물질을 얻어낸 것만 해도 훌륭한 일”이라고 했다. 라이터 교수는 지난해 ‘빈 메디컬 위클리’에 발표한 논문에서 한 두개골 시료가 베토벤의 것임을 확인했다. 미국 UC 산타크루스의 고고유전학 전문가인 에드 그린 교수는 뉴욕타임스(NYT)에 “역사가 서로 다른 머리카락 시료 유전자가 일치했다는 점에서 진짜 베토벤의 DNA라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고 말했다.
그동안 베토벤의 사인을 두고 여러 주장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납중독설이다. 그 증거는 지난 1994년 소더비 경매에 나온 15㎝ 길이 머리카락 다발이다. 소장자인 폴 힐러의 서명이 담긴 문서도 있었다. 1999년 이 머리카락에서 정상인의 100배에 이르는 납이 검출됐다. 사람들은 생전 베토벤이 도나우강의 민물고기를 즐겨 먹었는데, 당시 도나우강은 공장에서 배출한 중금속에 오염된 상태였다고 추정했다. 이번 연구에서 납중독설은 근거를 잃었다. 힐러 소장본의 DNA를 분석했더니 여성의 머리카락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청력 상실 원인은 밝혀지지 않아
베토벤은 사망 9년 전부터 청력을 완전히 잃었다. 하지만 이번 유전자 분석에서는 청력 상실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연구진은 청력을 손상하는 여러 질병을 살폈다. 그중 하나가 자가면역질환인 루푸스다. DNA 분석에서 베토벤은 루푸스 발병 위험이 유전적으로 높다고 나왔다. 하지만 루푸스에 걸렸다고 다 청력을 잃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원인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그동안 베토벤의 청력 상실이 이경화증(耳硬化症)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 병은 귀에 있는 작은 뼈인 등골(鐙骨)이 다른 부분과 붙어 생긴다. 하지만 이경화증의 원인 유전자가 아직 밝혀지지 않아 검증할 수 없었다. 이번에 유전자가 해독된 만큼, 장차 이경화증 유전자가 밝혀지면 바로 검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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