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훈의 산인만필(散人漫筆) <24>] 대의(大義)와 천륜(天倫) 사이의 갈등
‘맹자’는 공자가 ‘춘추(春秋)’라는 역사책을 지은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상이 쇠퇴하고 바른 도가 미약해지니 그릇된 말과 거친 행동들이 생겨났다. 신하로서 군주를 죽이고 아들로서 아버지를 죽이는 자도 나오게 됐다. 공자가 이를 두려워해 ‘춘추’를 지었다(世衰道微, 邪說暴行有作. 臣弒其君者有之, 子弒其父者有之. 孔子懼, 作‘春秋’).”
예부터 신하나 자식이 군주나 어버이를 죽이는 행위를 ‘시(弑)’라고 하여 ‘살(殺)’과 구분했다. 그만큼 최악의 패륜 범죄라는 의미다. 240여 년간의 역사를 다룬 ‘춘추’에는 시해 사건이 36차례나 기록돼 있다. 전한(前漢) 전기의 동중서(董仲舒)가 지은 ‘춘추번로(春秋繁露)’에 “군주 시해가 36회, 망한 나라가 52개”라는 통계가 나온다.
‘논어’에는 제(齊)의 진성자(陳成子)가 주군 간공(簡公)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들은 공자가 목욕하고 조정에 나아가 노애공(魯哀公)에게 전항(田恒·진성자의 본명)을 토벌하자고 간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 제자 중 중유(仲由)와 염구(冉求)가 비록 권력자 밑에서 벼슬살이하고 있지만, “아버지와 군주를 죽인 자는 역시 따르지 않을 것(弑父與君, 亦不從也)”이라고 말하는 대목도 있다.
춘추시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동류의 사건들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4세기 말 선비족(鮮卑族)의 척발규(拓跋珪)는 북방의 통일 왕조 북위(北魏)를 창건하는 큰 업적을 남겼으나 아들 척발소(拓跋紹)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죄를 지어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척발소의 생모가 사람을 보내 구원을 청하자 아들이 부하들을 데리고 궁중에 난입,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다. 척발규는 39세, 척발소는 16세였다. 척발소는 곧 이복형 척발사(拓跋嗣)에게 주살됐다.
그로부터 40년쯤 후에 남방의 송(宋)에서는 태자 유소(劉劭)가 궁중 정변을 일으켜 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을 살해하고 황제가 됐다. 아버지의 미움을 사 태자의 자리가 위태롭게 되자 선수를 친 것이다. 그러나 석 달도 못 가 훗날 무제(武帝)가 되는 동생 유준(劉駿)의 공격을 받고 피살됐다.
남북조를 통일한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도 아들인 양제(煬帝) 양광(楊廣)에게 피살됐다고 전해진다. 역사에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사망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큰 것으로 짐작된다.
755년 50대 초반에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安祿山)은 연(燕)을 세워 건원칭제(建元稱帝)하다가 불과 2년 만에 아들 안경서(安慶緒)에게 살해당한다. 안경서도 2년 뒤 부하 사사명(史思明)에게 암살되고, 황제로 행세하던 사사명 또한 2년 뒤에 아들 사조의(史朝義)의 손에 죽는다. 2년이 지난 763년에는 사조의도 당의 토벌군에 패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주전충(朱全忠)으로 잘 알려진 주온(朱溫)은 10세기 초에 당을 멸망시키고 후량(後粱)을 세운 뒤 6년 만에 아들 주우규(朱友珪)에게 피살됐다. 총애하던 양자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이 주우규 또한 즉위한 지 반년 만에 동생 주우정(朱友貞)에게 피살됐다.
역대의 시해 사건 중에는 권력 찬탈을 목적으로 계획적으로 저지른 경우도 많지만, 군주가 무도하거나 본분을 지키지 못해 그러한 환경이 조성된 사례도 적지 않다. 이를 두고 ‘역경’ 괘사(卦辭)의 해설문 중 일부인 ‘문언(文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하가 그 군주를 죽이고 자식이 그 아비를 죽이는 일은 일조일석에 생기지 않으니 그 유래는 점차로 쌓인 것이다. 다만 일찍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臣弒其君, 子弒其父, 非一朝一夕之故, 其所由來者漸矣. 由辨之不早辨也).” 사마천(司馬遷)도 ‘사기’의 서문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이렇게 말했다. “‘춘추’에는 군주 시해가 36건, 망한 나라가 52개나 기록됐다. 제후가 도망쳐 그 사직(社稷)을 보전하지 못한 일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 까닭을 살펴보면 모두 그 본분을 잊은 탓이다.”
‘논어’에도 잠깐 언급된 ‘최자시제군(崔子弒齊君)’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제의 대부 최저(崔杼)에게는 동곽강(東郭姜)이라는 예쁜 아내가 있었다. 군주 장공(莊公)이 그 미색에 혹해 어느 날 최저가 출타한 틈을 타 그의 집으로 가서 아내를 범했다. 그 뒤로도 여러 번이나 반복했다. 횟수가 잦아지자 간이 커진 군주는 최저가 쓰던 모자를 가져와 다른 신하에게 상으로 내리기까지 했다. 이에 크게 노한 최저가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뒤 군주가 다시 최저의 집으로 갔을 때 최저의 아내는 남편과 방에서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군주는 밖에서 기둥을 끌어안고 노래를 불렀다. 이때 미리 매복하고 있던 최저의 수하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군주는 담을 넘어 도망치려다 화살을 맞고 담에서 떨어져 살해됐다. 이 이야기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사기’에 수록돼 있다.
이러한 사건은 개인적인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천하의 대의를 위해 부득이 군주를 죽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상(商)과 주(周)를 세운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그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두 사람은 신하로서 그 주군인 걸(桀)과 주(紂)를 죽였으나 후대 사람들로부터 성군으로 칭송받는다. 맹자도 “신하로서 주군을 시해할 수 있나”라는 제선왕(齊宣王)의 물음에 “걸과 주가 인(仁)과 의(義)를 해친 ‘일개 필부(一夫)’에 지나지 않았으니, 탕왕과 무왕이 필부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군주를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론이다. 순자(荀子)도 이에 동조해, “탕왕과 무왕은 군주를 시해하지 않았다”면서 “두 사람은 백성의 부모이고 걸과 주는 백성의 원수”라고 주장했다.
이와 유사한 경우가 ‘대의멸친(大義滅親)’이다. 대의를 위해 친족을 죽인다는 말이다. 아무리 대의를 위해서라지만 형제 사이에도 불행한 일인데 부자지간이라면 더 끔찍하다. 이 말은 춘추시대 초기 위(衛)의 대부 석작(石碏)이 대의를 위해 아들 석후(石厚)를 죽인 데서 나왔다. 주우(州吁)가 이복형 환공(桓公)을 죽이고 군주가 될 때 석후가 그와 결탁했기 때문이다.
당나라 초기의 조정 대신 고진행(高眞行)은 아들 고기(高岐)가 모반에 가담한 혐의를 받자 직접 이를 처단했다. 황제가 적당히 처리하라고 했지만 그는 형과 조카를 불러 아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그 소식을 들은 황제는 불쾌히 여겨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켰다.
역사상 권력 찬탈 등의 목적으로 아버지를 죽인 예는 있어도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식이 부모를 죽였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 대신 자식이 부모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는 더러 눈에 띈다. 일례로 모범적인 관리들의 이야기를 담은 ‘사기’의 ‘순리열전(循吏列傳)’에 다음의 고사가 실려 있다.
춘추시대 초(楚)의 재상 석사(石奢)가 행차 도중에 살인자를 목격하고 뒤쫓아 가서 잡으니 자기 아버지였다. 그는 아버지를 풀어주고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잡아 단죄하면 불효이고, 법을 어겨 죄인을 풀어주면 불충이니 죽어 마땅하다”고 했다. 왕이 관대히 처리하려 했으나 그는 칼로 목을 베어 자결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고 가정할 때 ‘논어’의 다음 대목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섭공(葉公)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동네에 곧은 사람이 있는데 아비가 양을 훔치면 아들은 이를 증언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우리 동네의 곧은 이는 이와 다릅니다. 아비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숨겨줍니다. 곧음은 그 가운데에 있습니다.”
최근 어느 전직 대통령의 손자가 가족의 비리 의혹을 폭로함으로써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것이 과연 현대판 대의멸친일까. 그렇다면 그에게는 그 ‘대의’와 ‘천륜’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었을까. 이야말로 ‘역경’의 명구처럼 “어진 이는 이를 보고 어질다 하고, 슬기로운 이는 슬기롭다 말하리라(仁者見之謂之仁, 智者見之謂之智)”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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