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구단으로의 트레이드?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김종수 2023. 4. 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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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75)] '백만돌이' 전형수

 

2001년 KBL 신인드래프트는 지금까지도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역대 신인중 최고의 임팩트를 남긴 김승현 때문이다. 당시 김승현은 대학 무대를 휩쓴 정통 포인트가드로서 큰 주목을 받고 있었는데 그러한 명성을 입증하듯 프로 무대에 데뷔하기 무섭게 만년 약체 대구 동양 오리온스를 챔피언 결정전 우승으로 이끌었다.


신인왕은 지극히 당연했고 거기에 더해 베스트5, 어시스트상, 스틸상은 물론 정규리그 MVP까지 수상했다. '김승현으로 시작해 김승현으로 끝난 시즌이었다'는 말이 전혀 과장으로 느껴지지않을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아쉬운 선수가 있다. 당시 김승현은 3순위로 선발됐다. 1순위 송영진같은 경우 기대치에 못미치는 커리어를 남기기는 했지만 김주성과 함께 중앙대 전성시대를 이끈 트윈타워의 한축이라는 점에서 지명순위가 이해가 간다.


반면 2순위 ‘백만돌이’ 전형수(44‧180cm)는 김승현보다 앞서 2순위로 뽑혔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모습이다. 일부에서는 마치 실패한 픽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당시로서는 충분히 납득할만했다. 김승현이 정통파 1번으로서 큰 기대를 모았다면 전형수는 공격형 듀얼가드로서 어깨를 나란히하던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운이 좋았죠. 4학년때 좋은 모습을 보여서 평가가 더 올라갔고 마침 토종 자원중 공격력이 필요한 선수가 필요했던 코리아텐더에서 좋게 봐주셨죠” 명지고 전형수 코치는 여전히 겸손하게 당시를 회상하고 있지만, 당시 김승현이 워낙 센세이셔널 했을 뿐 전형수 또한 어지간한 시즌같았으면 충분히 신인왕을 노려볼만한 성적을 남겼다.

◆ 김승현 첫 시즌 기록 ☞ 54경기 출전 평균 12.2득점, 4리바운드, 8어시스트, 3.2스틸

◆ 전형수 첫 시즌 기록 ☞ 54경기 출전 평균 15.6득점, 2.2리바운드, 3.7어시스트, 1.1스틸

역대급 시즌을 보낸 김승현에게 스포트 라이트는 빼앗겼지만 신인 시절부터 코리아텐더의 에이스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한 전형수의 미래는 밝아보였다. 전형수는 충분히 소속팀에 만족하고 있었고 팬들 역시 ‘경쟁력있는 프랜차이즈 스타를 갖게됐다’고 좋아하는 분위기 일색이었다.


아쉽게도 전형수와 코리안텐더의 인연은 첫 시즌이 끝이었다. 어려운 살림살이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던 팀은 자금 마련을 위해 선수단에서 가장 가치가 높았던 전형수를 구단 운영비 마련을 위해 현대모비스로 현금 트레이드 해버린다.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가는 심청이같은 신세가 되고만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트레이드 얘기를 듣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어요. 그저 저를 뽑아준 이 팀에서 좋은 형들하고 즐겁게 농구하고 싶은 마음 하나뿐이었는데…, 소박한 행복이 깨져버렸다는 생각에 마치 가까운 이가 세상을 떠난 것 같은 절망감과 슬픔에 휩싸였던 기억이 납니다”


전형수는 심적으로 힘든 가운데서도 이후 3시즌간 평균 두자릿수 득점을 올리며 나쁘지 않은 활약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후 크고 작은 부상이 겹치고 소속팀을 자주 옮겨다니며 신인시절 기대치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안정을 원했지만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는 '전형수가 만약 원소속팀에서 꾸준하게 커리어를 이어나갔다면 리그 역사에 한획을 긋는 듀얼가드로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종종 언급되고 있다. 농구도 멘탈 스포츠이니만큼 자신이 원하는 환경에서 더욱 좋은 기량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 전형수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446경기 출전 평균 7.3득점, 1.7리바운드, 3.3어시스트, 0.6스틸 ​
⁕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01년 12월 25일 창원 LG전 = 35득점 / 3점슛 성공 ☞ 2001년 12월 2일 울산 모비스전 = 5개 / 어시스트 ☞ 2002년 12월 29일 서울 SK전 = 14개 / 스틸 ☞ 2003년 2월 15일 창원 LG전 = 4개
 

 

“한명 한명 성장시키는 재미로 지도자 생활하고 있습니다”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모교인 명지고등학교에서 지도자이자 선배로서 후배들 키우는 것만 신경쓰고 있어요. (주)희정이 형만큼은 아니지만 저역시 농구 외에는 별로 이것저것 관심두는 성향이 아니라서요. 머릿속에서는 늘 어떻게 아이들을 성장시킬 수 있을까? 그런 생각 밖에 없습니다. 좀 재미없는 남자죠.(웃음) 흔히 지도자를 지장, 맹장, 덕장 그렇게 나누잖아요. 그중에서 하나 뽑으라면 덕장쪽에 가깝지않을까 싶어요. 덕이 많고 그만큼 마음이 넓다는 뜻은 아니에요. 강하게 몰아붙이기보다는 알아서 잘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싶은거죠. 그렇다고 쓰지않는 단어까지 끌어오면서 순장이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하하핫…,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예전에는 그냥 지도자가 시키면 무조건 따랐지만 지금은 아이들을 이해를 시켜야되요. 제가 그렇게 배우지않은 세대라 처음에는 쉽지않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노력중입니다. 지도자 분들 중에는 훈련이나 경기중에 흥분하게되면 정말 열정적으로 밀어붙이는 분들도 계시는데 저는 그런 스타일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아요. 나름대로 색깔이 다르니까 남들을 따라하기보다는 저에게 맞는 지도법을 가져가는게 맞겠죠.

Q.몸을 보면 현역 때와 큰 차이가 없어보여요. 여전히 몸은 살아 계시죠?
그럴리가요?(웃음) 아이들을 가르칠 때 시범을 보이는 등 직접 몸을 써야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최소한의 상태는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제는 말로만 뭐라고해서는 지도하기가 힘들어요. 이해를 시켜야하는데 그러려면 직접 한번 시범을 보이는 것 만큼 좋은 방법도 없죠. 하지만 나이도 있고 이제는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어요. 제가 본래 나서는 것도 안좋아하고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이거든요. 하지만 지도자를 하다보니까 조금씩 바뀌는 듯 싶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요. 아이들 가르치는 사람이 뒤에서 쭈삣쭈삣하고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

Q.명지고의 팀컬러가 궁금합니다.
제가 올해 명지고에서 3년째에요. 매년 조금씩 노력하다보니 이제는 제법 색깔이 나오는 듯 싶어요. 제가 가드 출신이기는 하지만 포스트 위주로 전략을 많이 짜서 운영중이에요. 팀 내에 키 큰 선수가 많은지라 여러모로 장점이 많아요. 다양한 선택지를 가져갈 수 있거든요. 요즘 흐름이 공격적이고 빠른 농구잖아요. 빅맨이 많으면 그런 농구가 힘들 것 같지만 그렇지않아요. 리바운드 등 제공권 싸움에서 경쟁력이 있으면 가드나 윙자원들이 쉽게쉽게 뛸 수 있으니까 더 스피드하게 경기운영을 가져갈 수 있어요. 한마디로 높이 농구, 기동력 농구 다되는거죠.

Q.최근 빅맨 자원들은 체형이나 플레이 스타일 등, 예전과는 여러 가지면에서 다른 것 같아요.
그렇죠. 저희 세대 때만 하더라도 장신자중에는 몸집이 크고 힘이 좋은 유형이 많았습니다. 느리고 기술적으로 부족하더라도 골밑에서 몸싸움만 제대로 해줘도 어느 정도 인정받았거든요. 특별한 경우 빼고는 빅맨하면 그런 이미지를 많이 떠올렸죠. 하지만 최근에는 공간 활용이 중요시되다보니 이제는 그렇게해서는 힘들어졌습니다. 빅맨도 외곽슛을 갖춰야 하는 것은 물론 공수에서 함께 달려주는 것을 요구받고 있는지라 장신자들도 그런 부분으로 발전하고 있죠. 그렇다보니 상황에 따라서 포지션 전향하기도 예전보다는 다소 수월해졌고요. 물론 이른바 하드웨어로 전부 씹어먹을 정도되면 구태여 그렇게 하지않아도 되겠지만 그런 선수는 예나 지금이나 매우 드물겠죠.(웃음)

Q.팀내 밸런스가 잘 잡힌 것 같은데 가르치시는 제자 중 주목할만한 선수로는 누가 있을까요?
제가 여자프로농구 신한은행에 있다가 안양고에서 코치를 시작했거든요. 당시 저에게 배우고싶다고해서 인연이 닿게된 중3 학생 둘이 있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3년전에 명지고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친구들도 따라온거죠. 처음부터 선생님에게 배우기로 했으니까 끝까지 책임지시라고요.(웃음) 살짝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만큼 저를 믿어준다는 것이니까 고마운 마음이 컸습니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서 둘다 고3이 되었네요. 이 친구들을 주목할 수밖에 없는게 본격적으로 농구를 시작한게 3년 밖에 되지않았거든요. 그런데 나날이 실력이 늘어서 앞으로가 더더욱 기대된다는 부분입니다. 각 대학에서도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Q.이름이 어떻게 될까요?
장찬(200cm)과 김정현다니엘(195cm)입니다. 장찬은 센터고 김정현다니엘은 스몰포워드로 장신 슈터 스타일입니다. 김정현다니엘같은 경우는 이름이 조금 특이하죠. 저희 팀에 김정현이 둘이 있어요. 한명은 2학년이고 김정현다니엘은 3학년이죠. 이중국적인데 미국식 이름까지붙어서 김정현다니엘이 됐죠. 참고로 이름만 들어보면 혼혈로 오해할 수도 있을 듯 싶은데 전혀아닙니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8살때인가 한국으로 들어온 케이스에요. 장찬같은 경우 센터를 맡고있지만 장기적으로보면 파워포워드로 바꾸는게 어떨까싶고 본인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빅맨으로서 아주 크지는 않지만 윙스팬이 좋아요. 210cm정도 될거에요.

Q.제자들이 잘 성장해주고 있어서 가르치는 맛이 날것 같아요.
그렇죠. 저희같은 지도자들은 그게 낙 아니겠어요. 처음 제가 모교에 코치로 왔을 때 팀이 어수선했습니다. 부모님들끼리 불화가 있어서 잘하는 선수들이 다 전학가버리고 농구부원이 5명밖에 남아있지 않았어요. 제일 큰 친구가 키가 185cm였습니다. 솔직히 어떻게해야 되나 착찹한 기분부터 들더라고요. 하지만 모두가 함께 노력하다보니까 이제는 다시 팀이 두터워지고 있습니다. 작년 재작년만해도 대회만 나가면 예선탈락이었거든요. 올해는 첫대회때 8강에 올랐고 대진운만 따르면 4강 이상의 성적도 기대해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재능있는 선수를 놓치는 실수는 하고 싶지않습니다”

Q.앞서 주희정 고려대 감독을 잠깐 언급했는데 두분이 많이 친하다고 들었어요.

아시다시피 희정이형이 학교를 중퇴하고 프로팀에 연습생으로 들어갔잖아요. 그래서 대학시절많이는 함께 하지못하고 한 두달 정도 같이 했을거에요. 희정이형, (이)규섭이 형, 저까지해서 나이대가 엇비슷하잖아요. 규섭이형같은 경우 워낙 팀내 입지가 대단했고요. 저는 사실 별로 대단한 것은 없었습니다. 희정이형은 대학에 와서 알았어요. 당시 형이 고등학교 시절에 대회를 많이 못나가서 그전에는 전혀 몰랐거든요. 다른 이들에게 얘기를 들어보니까 정말 잘했던 선수라고 하더라고요. 아쉽게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정말 못받았죠. 형이 연습생으로 들어가서 신화를 쓰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는 어떤 식으로든지 눈에는 띄었을 듯 싶어요. 형은 정말 연습벌레거든요. 거기에 승부 근성이…, 와우! 같은 선수지만 그저 놀라울뿐이에요. 현역에서 은퇴한지 한참 지났음에도 여전히 자기 관리가 철저해요. 식단 관리부터 해서 심지어 커피까지도 칼로리 따져가면서 마신다니까요. 오죽하면 제가 형이랑 같이 밥 못먹겠다고 투정을 부려보기도 했습니다.(웃음) 형이랑 인터뷰도 해보셨다고하니까 아시겠지만 형은 정말 사람이 소탈하고 좋아요. 농구적인 부분만 철저하지 나머지부분에서는 인간미가 넘쳐요. 자기 자신에게만 엄격할 뿐 다른 이들을 대할 때는 절대 까다로운 사람도 아니고요.

Q.주희정 감독의 예를 봐도, 선수는 어떻게 성장하느냐에 따라서 방향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정말 원석인데 기회를 못받아서 사장되는 경우도 있을 듯 싶고요.
맞습니다. 정말 빼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하다가 기회도 못받고 한창 성장해야 될 때 뛰지못하면 묻혀버리는 케이스도 분명 있겠죠. 제 마음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도자로 있는 동안에는 그런 부분에서 실수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 잘 클수 있었는데 혹시나 저를 만나서 꽃이 피지못하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희정이형도 정말 아슬아슬했잖아요. 지도자로서 편견을 가지지않고 두눈 똑바로 뜨고 제자들 하나하나를 잘 살피고 싶습니다.
 

 

Q.요새 농구인 2세들이 화제인데 혹시 농구하는 자녀들이 있을까요?
첫째가 딸이고요. 둘째 셋째가 아들이에요. 나름 다둥이 아빠입니다. 둘째가 용산중학교에서 농구하고 있습니다. 2학년으로 SK연고선수입니다. 현재 키는 183cm로 현역때 저보다는 큰데 욕심같아서는 조금 더 컸으면 싶죠. 병원에서는 190cm가량까지는 클 수 있다고 하던데…, 이런 부분은 뜻대로 안되는것이니까 크면 좋고 아니더라도 본인이 즐거운 마음으로 농구를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잘하고 못하고는 두 번째 문제고요.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이 행복하게 최고죠.

Q.키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본인 역시도 키가 190cm만 됐어도 포인트가드를 안했을 듯 싶어요.
그렇죠. 본래 저는 중학교때까지 포워드였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가드를 하게됐죠. 익숙치않아서 정말 고생많이했던 기억이 나요. 본래 가드라는 것은 센스나 시야 등을 타고나야 되는 부분도 있어요. 저는 그런 부분에서 재능이 썩 뛰어나지 못했던지라…, 사실 키가 딱 180cm였던지라 프로와서도 포지션 쪽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신장이 아쉬웠던 대부분 선수들도 그런 마음알거에요. 키가 크면 적성에 따라 선택의 폭이 넓어지지만 작으면 뭐, 그런 자유 자체가 없어집니다.

“왼손잡이를 부러워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습니다”

Q.농구를 시작하게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본래 강원도 태백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아버지가 그곳에서 일을 하고 계셨거든요. 당시 방과후 수업이라는게 있었어요. 4학년때 별 생각없이 체육관에 가서 친구들과 함께 놀면서 농구공을 잡아본게 시작이에요. 농구를 하면 빵과 우유도 주고 나중에 대학교 들어갈 때 등록금 안내도 된다고 하는 등 여러 가지 혜택에 눈이 멀었던 이유가 크죠. 솔직히 말하면 딱히 재능이 돋보였던 것도 아니에요. 키가 크지도 그렇다고 잘 달리거나 운동신경이 좋았던 것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어요. 하나를 알면 두 개를 까먹었죠.(웃음) 타고난게 별로 없어서 그랬는지 요령은 잘 피우지않았어요. 선생님이 시키면 시키는데로 하려고 노력은 했죠. 그러다보니 실력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고 재미가 생기더라고요.

Q.농구가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군요?
그렇죠. 그것 하나로 버틴거죠. 아시다시피 당시는 체벌이나 구타가 만연하던 시기였잖아요. 그야말로 엄청 맞았죠. 본격적으로 5학년 때부터 농구를 시작했는데 정말 많이 맞았습니다. 하루라도 안맞으면 ‘왜 이렇게 조용하지?’하고 외려 불안한 마음이 들었을 정도니까요. 많이 맞은 날은 걷기도 힘들고 엉덩이도 시커멓고 그랬습니다. 어느날 집에서 팬티를 갈아입는데 어머니가 제 엉덩이를 보신거에요. 어머니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지셨겠죠. 저도 부모가 되어보니까 그때 어머니 심경이 이해가 갑니다. 어머니는 당장 농구 그만두라고 펄펄 뛰셨고 저는 안된다고 막 다퉜던 기억이 납니다. 두들겨 맞고 기합받는 고통보다 농구를 하는 재미가 더 컸으니까요.
 

 

Q.언제부터 두각을 나타냈을까요?
초등학교때 농구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눈에 띄었던 것 같기는 해요. 제가 왼손잡이다보니 아무래도 수비 입장에서는 막기가 까다로웠나봐요. 같은 공격을 하더라도 약간은 득을 보지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당시 강원도에서 농구부가 있는 중학교는 춘천중밖에 없었어요. 농구를 계속하는게 맞을까 잠깐 고민이 들던 그때 부모님께서 이왕 할거면 큰 물에 가서 놀아라하면서 서울로 전학을 보내셨어요. 그때가 6학년 2학기였는데 함께 농구하던 친구와 같이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쭉 같이 하숙을 했습니다. 이후에는 온가족이 이사를 오게되서 함께 살게됐고요. 


Q.본래부터 왼손잡이였나요?
네. 글씨도 왼손으로 쓰는 등 모든 생활에서 왼손이 편한 리얼 왼손잡이입니다. 어릴 때 할아버지께서 왼손 쓰지말라고 혼내시고 그러셨는데 타고나기를 왼손잡이인데 어쩌겠어요. 농구하는 내내 제가 왼손잡이인 것을 부러워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어요. 솔직히 당사자인 저는 잘 못느끼겠지만 스포츠에서는 왼손이 유리하다는 말을 많이하잖아요. 평소 자주 겪어보지못한 생소함이 가장 큰 이유라고 짐작만 할뿐이죠.

Q.당시 플레이 스타일이 궁금합니다.
저는 이른바 천재과로 불리던 선수들처럼 다방면에서 재능이 돋보이고 그러지는 못했어요. 다만 슈팅능력이 좀 있었고 같은 신장대에서는 피지컬도 좀 괜찮았다고 생각해요. 하체운동을 워낙 열심히 했던지라 언제부터인가 뛰고 달리는 쪽에 자신감이 붙더라고요. 하체가 좋으면 기동성이나 점프력 등이 상승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뭐, 프로에 가서도 그런 스타일로 살아남았고요.(웃음)

Q.원하는 학교가 꽤 있었을 듯 싶은데 최종 선택은 고려대였습니다.
명지고 시절부터 의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던 형이 한명있었어요. 그 형이 고려대로 진학을 했어요. 그걸보면서 저도 형을 따라서 고려대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더불어 전희철, 현주엽 등으로 대표되던 특유의 남자다운 이미지가 있었잖아요. 그런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솔직히 여러 학교에서 스카웃 제의가 있기는 했어요. 이런저런 혜택을 제시받기도 했고요. 거기에 더해 저와 당시 고려대는 잘맞지않는지라 연세대로 가는게 좋을것이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본래 마음먹으면 다른 곳을 잘 쳐다보지않는 성격인지라 그대로 고려대로 직진했죠.
 

 

“트레이드 소식을 듣고 주저앉아 펑펑 울었습니다”

Q.드래프트때 전체 2순위로 뽑혔어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겸손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저는 진짜 그 정도까지 높은 순위는 기대하지 않았어요. 솔직히 말하면 대학 3학년 시절까지는 프로선수나 될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습니다. 실력도 정체된 것 같고 역할 역시 수비 위주로 맡고 그랬으니까요. 그러다가 4학년 시절에 약간의 반전이 생겼습니다. 연세대와 정기전을 하는데 유달리 몸이 가볍고 컨디션이 좋더라고요. 거기서 활약을 좀 크게 했어요. 저희 학교가 60몇점인가를 넣었는데 제가 그 절반 정도를 책임졌습니다. 여기서 빠져서는 안될 것중 하나가 픽앤롤 플레이에요. 이전에 최철권 코치님께서 저에게 프로는 외국인선수가 있으니까 가드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픽앤롤을 할줄 알아야 된다고 하셨고 뒤늦게 배우게 됐죠. 그리고 정기전때 몇차례 성공시켰습니다. 그 장면을 프로 감독님들이 와서 보시고 좋은 점수를 주셨던 듯 싶습니다.

Q.2순위로 뽑히면서 3순위 김승현과 라이벌구도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솔직히 실력만 놓고보면 (김)승현이가 저보다 먼저 뽑히는게 맞았죠. 제가 구태여 설명하지않아도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다들 알고있잖아요. 다만 당시 코리안텐더(지명당시 골드뱅크)가 (현)주엽이형이 군입대를 앞두고있던 상황이었던지라 공격력을 갖춘 토종 선수가 필요했고 그래서 제가 먼저 뽑히게 됐죠. 만약 제가 오리온스에 가게됐다면 우승까지는 힘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당시 오리온스는 기존 선수들까지 살려주는 정통 포인트가드가 필요했는데 저는 그런 쪽과 맞지 않았으니까요. 열심히는 했겠지만 승현이만큼의 효과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당시 본인을 지명한 팀이 경제적으로 힘들었어요. 왜 하필 저팀인가라는 생각은 들지않았나요?
전혀요. 저를 2순위로 뽑아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무척 감사했습니다. 인정해줬다는 것이잖아요. 너무 감격스러웠고 정말 잘해서 보답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않았어요. 여러매체에서도 종종 다뤄줬듯이 당시 팀 사정이 어렵기는 했어요. 당장 의식주부터 많이 떨어지기는 했죠.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팀이 싫고 그런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Q.팀 사정상 현금트레이드를 당했는데(?) 그때 충격이 컸다고 들었어요.
컸죠. 정말 많이 컸습니다. 한시즌을 제대로 마치고 다음 시즌을 준비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개막 이틀 전인가 통보를 받았어요. 전세 아파트 한 채에서 모든 선수들이 살고있던 시절이었죠. 제대로 못먹고 불편하고 그러기는 했지만 좋은 형들과 정을 나누고 함께 으쌰으쌰하는 분위기가 정말 좋았습니다. 팀에 대한 애정도 정말 컸죠. 트레이드됐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더라고요. 털썩 주저앉아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달래주던 형들도 같이 울고요. 정말 부모님 잃은 자식처럼 서럽게 울고 또 울었죠. 지난 일이라서 얘기하는 것이지만 모비스에서 차가와서 짐 챙겨서 떠나는데 너무 화가 나고 실망스러워서 농구고 뭐고 때려쳐야겠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모비스로 와서 한동안은 충격으로 불면증이 찾아와서 수면제를 먹지않으면 잠을 들지못했습니다. 성격도 예민해졌고요.
 

 

Q.안정감을 중요시하는 성격인 듯 한데 결과적으로 팀을 여러번 옮겨다니게 됐어요.

그렇게 됐죠.(웃음) 고려대 갈 때도 그랬었고 저는 다른 무엇보다도 동료들과의 정이나 그런 것을 되게 중요시했거든요. 하지만 신인 시절 그렇게 충격을 먹고나니까 허망해지더라고요. 프로의 세계가 이런 것이구나 싶기도하고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했죠. 모비스에서 마음잡고 나름 열심히 했지만 부상을 당한 이후 성장이 정체되고 내리막 길을 타게되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트레이드 이후에는 예전처럼 농구하는게 행복하다고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그냥 프로니까 참고하자 그런 마인드였지만 저란 사람하고는 썩 잘 어울리지는 않았죠.

Q.만약 계속 코리아텐더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했어요.(웃음) 저 트레이드 되고 난후 (현)주엽이형이 돌아왔잖아요. 주엽이형과 애런 맥기, 게이브 미나케 두 외국인선수가 트리오를 이루어 돌풍을 일으켰어요. 그것을 보면서 함께 뛰었으면 정말 좋았겠다는 마음이 가슴 속에서부터 불끈불끈 차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여전히 제가 데뷔했던 팀에 대한 애정도 있었거니와 서로간 조합에서도 잘맞을 것 같더라고요. 당시 주엽이형은 패스에 재미를 붙이며 포인트 포워드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어요. 형이 주로 공을 잡고 패스를 돌리는지라 정통 1번보다는 저같은 공격형 듀얼가드가 더 잘맞을 수 있었죠. 저도 패싱 게임에 대한 부담을 덜고 좀 더 공격에 집중할 수 있었겠고요. 기자님이 생각해도 좋은 구성 아닌가요?(웃음)

Q.함께 뛰어본 외국인선수중 인상적이었던 선수로는 누가 있을까요?
저는 단연 에릭 이버츠요. 기량적인 부분에서도 뛰어나지만 성품이 정말 좋았어요. 동료들에 대한 배려심도 깊고 둥글둥글 정말 잘 어울렸어요. 함께 뛰는 동료는 물론 지도자들까지 정말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선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금도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고있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제가 프로 감독이라면 0순위로 영입하고싶은 외국인선수입니다.(웃음)

Q.은퇴하고 바로 신한은행 코치로 합류했어요.
나이도 먹고 이런저런 부상도 쌓이다보니 오리온 시절에는 쉬는날 병원다니는게 일이었어요. 괜스레 후배들이 활약할 자리만 빼앗는 것 같고 이제는 안되겠다 싶어서 계약기간이 남았는데도 은퇴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첫 번째로 신한은행 코치 제의가 왔을 때는 추일승 감독님께서 조금만 더 뛰어달라고 저를 잡으셨어요. 당시 팀에 나이먹은 선수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중심을 잡아줄 고참급 선수가 필요했던 거죠. 사실 그때는 몰랐어요. 하지만 다음 해에 다시 한번 신한은행에서 제의가 오자 웃으시면서 사실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현역 연장을 부탁했던건데 두 번은 못잡겠다하면서 얘기를 해주시더라고요. 사실상 감독님은 제 은인이세요. 좀더 일찍 은퇴를 고민하던 시기에 오리온으로 저를 불러주셨고 은퇴를 결심했을 때는 은퇴식도 치러주셨죠. 감독님 덕분에 마무리를 좋게 한 것 같아 늘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Q.신한은행에서 코치 및 감독대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을 듯 싶어요.
그렇죠. 지도자 생활 초기인지라 부족한 것도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일단 여자선수들은 남자선수와 달라요. 신체조건이나 성격, 성향 등에서 같을 수가 없죠.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을 잘 몰랐어요. 그냥 남자선수와 똑같은 운동선수라고만 생각하고 접근하다보니 시행착오가 많았습니다. 서로간의 다름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죠. 그때 경험이 이후 학생들을 가르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Q.카카오톡 프로필을 보니까 ‘내려놓음’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더라고요.
하하핫…, 그냥 나이를 먹을수록 그래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요. 지도자를 하다보면 아이들을 더 잘 가르쳐야겠다는 욕심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질 때가 많아요. 조금만 더 노력하면 지금보다 나을텐데 등…, 어쨋거나 그런 심정을 누구한테 얘기하겠어요. 아내하고 밤에 맥주한잔하면서 푸념하는게 전부죠. 그러다가 문득 나와 저 아이들은 같을 수가 없는데 너무 조바심을 내고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코치가 제자들보다 급해져서는 안되잖아요. 내려놓자. 내려놓고 천천히 정확하게 되짚어가면서 가자는 쪽으로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때로는 느린게 빠를 수도 있는 말도 있잖아요. 비단 농구 지도뿐 아니라 삶 전체에서 잠시 내려놓고 주위를 살펴보는 여유도 필요할 것 같아서 그렇게 적어보았습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KBL 제공, 한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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