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은 친미 아니면 반미? 70여년 굳어진 질서가 요동친다
전통적 동맹에 미국 영향력 줄고, 중·러 영향력 커져
친미 대 반미, 수니파 대 시아파,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 여부 등을 놓고 갈라졌던 중동의 전통적 지정학적 구도가 급격히 흐트러지고 있다. 이 흐름을 불러온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중동 정책을 떠받쳐온 ‘두 기둥’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이다. 사우디는 서방과 중국·러시아 사이에서 적극적인 ‘등거리 외교’에 나서고 있고, 폭주하는 이스라엘의 극우 정권은 미국이 그려둔 중동 정책의 밑그림을 뒤흔들고 있다. 그 결과 전후 70여년 동안 유지된 미국의 중동 내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거대한 지정학적 변화가 현실화되는 중이다.
지난 7일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의 무장 정파 하마스가 실효지배하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와 시아파 무장 정파 헤즈볼라가 지배하는 레바논 남부를 공습했다. 이스라엘군이 이날 공습에 나선 것은 5일 일어난 소동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날 메카·메디나에 이은 이슬람의 3대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에 난입해 안에서 농성을 벌이던 팔레스타인 시민들을 끌어냈다. 이 사원이 자리한 성전산은 기독교·이슬람교·유대교 등 3대 종교 모두의 성지로 예배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유대인도 방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날은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의 첫날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날 유대인들이 이곳을 찾는 것은 기도를 위한 것이라며 사원 출입을 막았다. 그러자 이스라엘 경찰이 출동해 사원 안에서 농성하던 이들을 끌어낸 것이다.
이스라엘 경찰의 알아크사 사원 진입은 지난 2000년 팔레스타인의 2차 민중봉기(인티파다)를 촉발한 극히 민감한 사안이다. 분노한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향해 로켓 공격을 퍼부었다. 이스라엘이 이에 대응해 보복 공습에 나서자 한동안 이스라엘과 관계 개선을 추진해온 사우디 등 주변 아랍국들이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비난 성명을 쏟아냈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이스라엘 내각은 역대 최악의 극우 정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은 국외적으로는 주변 아랍 국가들과 마찰을 빚고 국내적으로는 ‘사법 장악’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사법 개편안을 무리하게 추진하며 시민사회와 충돌하는 중이다. 보다 못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매우 걱정스럽다”고 말하자 네타냐후 총리는 다음날 새벽 1시께 소셜미디어를 통해 우린 “주권국가”라며 날 선 반응을 보였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정상들이 설전을 벌여야 할 정도로 악화된 것이다.
다른 한편에선 사우디가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수니파 맹주국인 사우디와 시아파의 맹주국인 이란의 외교부 장관은 6일 베이징에서 만나 회담했다. 중동의 ‘앙숙’인 두 나라는 앞선 지난달 10일 중국의 중재 아래 베이징에서 2016년 이후 끊긴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합의를 이뤄냈다. 그러자 미국에선 “사우디가 바이든 대통령의 따귀를 때렸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첫 발표에 이어 후속 협상마저 중국의 중재 아래 베이징에서 진행된 것이다.
사우디는 또 다른 시아파 국가인 시리아에도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지난 2일 사우디가 5월에 자국에서 열리는 아랍연맹(AL) 정상회의에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초청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2011년 아랍의 봄을 계기로 ‘시리아 내전’이 시작되자 사우디는 아사드 정권 타도를 위해 수니파 반군들을 지원했다. 한때 자신이 쓰러뜨리려던 이를 초대해 관계 개선에 나선 셈이다.
사우디의 ‘독자 행보’는 미국의 신경을 긁고 있는 감산 흐름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사우디가 주도하는 산유국 모임인 ‘오펙 플러스’ 회원국들은 지난 2일, 5월부터 하루 166만배럴을 감산한다는 결정을 내놓았다. 지난해 11월부터 하루 200만배럴을 감산하겠다고 결정한 뒤 여섯달 만에 다시 감산 결정을 내렸다. 40년 만에 닥친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고심 중인 미국의 뒤통수를 연달아 때린 모양새다.
중동의 익숙한 지정학의 판을 흔드는 이 모든 변화는 사우디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실권을 쥐게 된 2017년께부터 시작됐다. 여기에 국제 질서를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대결’로 보는 바이든 행정부의 등장(2021년 1월), 세계를 ‘신냉전’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우크라이나 전쟁(2022년 2월), 이스라엘 극우 정권 출범(2022년 12월) 등의 충격이 이어졌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중국과의 전략 경쟁에 집중하려 중동에서 발을 빼려는 미국에 대응하려 오랫동안 이어온 ‘대미 일변도’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엔 큰 마찰을 빚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2015년 7월 맺은 ‘이란 핵협정’(JCPOA)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며 사우디 등 수니파 왕정 국가들과 관계를 강화했다. 또 이들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개선해 중동의 안정을 확보하려 했다. 이런 외교적 노력은 2020년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UAE)·바레인의 국교 정상화를 가능케 한 ‘아브라함 협정’(Abraham Accord)이라는 결실로 이어진다. 자연스럽게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협력도 가시화됐다. 사우디 주도의 친미 수니파 동맹과 이스라엘이 한편에 서서 이란이 주도하는 반미 시아파 연대를 봉쇄하는 중동의 지정학적 구도가 강화되는 듯했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며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이들은 이란 핵협정 복원을 추진하고, 예멘 내전에 대한 사우디의 개입을 억제하려 했다. 또 ‘민주주의’의 가치를 내세우며 무함마드 왕세자의 가장 큰 약점인 저명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을 거론했다. 미국의 잇따른 비우호적인 움직임에 코너에 몰리게 된 사우디는 중·러와 관계를 강화하는 선택을 내리게 된다.
때마침 2022년 2월 말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며 전세계의 에너지 가격이 폭등했다. 자연스레 사우디의 영향력이 강화됐다. 사우디는 미국 등이 주도하는 러시아 제재에 불참하고, 오히려 이 그물망에 구멍을 내려 했다. 전쟁 발발 직후인 지난해 3월 사우디가 중국과의 석유 거래에서 위안화 결제를 추진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사우디는 전쟁으로 폭등한 에너지 가격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증산을 요구하던 미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두번에 걸친 감산을 주도했다. 에너지 시장에서 러시아의 입지를 강화해 서방의 대러 제재를 무력화하는 결정이었다. 이 틈을 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12월 사우디 등을 방문해 경제협력과 석유거래에서 위안화 결제 추진 구상을 밝혔다.
그해 연말인 12월29일 이스라엘에선 네타냐후 총리가 복귀했다. 지난 3년간 6차례의 총선을 치르는 권력투쟁 끝에 네타냐후 총리는 유대교 근본주의 세력과 손잡고 승리해 역대 최악의 극우 정권을 출범시켰다. 인종주의 범죄 전과자인 이타마르 벤그비르 치안장관은 1월3일 알아크사 사원 방문을 강행하며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에 불을 지폈다. 이후 아랍 주변국들을 자극하는 이스라엘의 행태가 이어지며 아브라함 협정을 기초로 중동의 안정을 찾으려던 미국의 구상이 힘을 잃게 됐다. 사우디 역시 이란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중·러와 협력을 확대하는, 미국의 희망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된다.
중국의 중재로 사우디와 이란이 국교를 정상화하기로 합의한 직후인 3월16일부터 3일간 중·러·이란의 해군이 출동해 아라비아해에서 연합훈련을 실시했다. 이 훈련에 참가하고 귀환하던 러시아의 고르시코프 제독함은 사우디의 주요 전략 항구인 제다에 입항했다. 러시아 군함이 사우디에 기항한 것은 10년 만이다.
물론, 미국과 사우디는 서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미-이스라엘 관계도 차츰 복원될 것이다. 하지만 사우디는 이후에도 미국에 의존하던 기존의 외교 관성에서 벗어나 중·러와 관계를 강화하는 ‘등거리 외교’ 노선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중동 전체가 미국 주도의 ‘일극체제’와 중·러가 추진하는 ‘다극체제’가 경쟁하는 거대한 경연장으로 변한 것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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