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가 간 정보 전쟁엔 동맹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 우리 능력 키워야

조선일보 2023. 4. 11.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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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보기관들이 동맹국들의 외교·안보 라인을 감청했다는 정황이 담긴 문서들이 유출됐다. 이 문건들에는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포탄 우회 제공 문제를 놓고 한국 국가안보실 고위 당국자들이 나눈 민감한 대화까지 담겼다고 한다. 대통령실은 “사실 관계 파악이 우선”이라며 미 측의 조사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대통령실은 특정 세력의 개입 가능성도 거론했다. 한미 동맹을 이간하려는 의도가 깔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그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미국의 감청 의혹을 섣불리 사실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 문건에 등장하는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 등에 대한 간단한 사실 확인 절차를 통해 진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자체 조사 결과 감청 의혹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재발 방지 요구 등 적절한 외교적 대응을 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 사이의 정보 전쟁에는 우방도 동맹도 없다. 정보 세계의 상식이며 공공연한 비밀이다. 미국만 감청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과 정보 동일체인 이른바 ‘파이브 아이스’ 국가들은 전 세계를 감청한다. 이 감청 대상에 동맹국이라고 빠지지 않는다. 러시아, 중국, 이스라엘 등 안보에 민감한 국가들 모두가 다른 나라를 감청한다. 하지 않는다면 무능이거나 바보일 뿐이다. 이는 안보 문제로서 정보기관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감청하는 정치적 비리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월 24일 국가정보원 청사를 방문해 2023년도 업무계획을 보고받기 전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다. (왼쪽 부터)김규현 국정원장,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이 지켜보고 있다. 윤 대통령은 방명록에 '자유 수호를 위한 헌신을 지지합니다.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기 바랍니다'라고 적었다. (대통령실 제공)/뉴스1

미국의 전방위적 도·감청이 문제가 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전직 CIA 직원 스노든은 2013년 미국이 한국·독일 등 우방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인터넷·이메일·전화를 도·감청해 왔다고 폭로해 논란이 됐다. 독일 총리 전화까지 감청했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이런 활동은 계속될 것이다. 일반 시민은 이런 국제 정치의 현실을 도덕적 잣대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국가가 그런 판단을 한다면 어리석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초유의 안보 참사”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 탓” “미국 대사 초치하라”는 민주당의 주장은 현실을 모르거나 외면하는 정치 공세에 불과하다. 민주당 정권 때도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은 우리 정부 감청을 당연히 시도했을 것이다. 북한과 맞닿아 있고 주변 강국들과 정치·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국은 대표적인 정보 전쟁터다. 미국의 동맹이면서도 정권에 따라 대미·대북 정책이 급변하기 때문에 각국 정보기관이 정보 역량을 집중 투입하는 나라 중 하나가 우리다. 이런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감청의 당, 부당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감청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전제 아래 우리가 감청당하지 않게 역량을 강화하고, 우리가 상대를 감청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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