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기후부정의에 대한 청구서
정부가 2분기 공공요금 인상을 유보했다. 한숨 돌렸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다. 한전과 가스공사 적자를 들먹이며 이내 인상된 고지서를 보낼 것이다. 적자 구조에 대한 근본적 분석과 대안은 없고, 범국민 에너지 절약 운동 같은 걸 또 내놓을 것이다. 많이 쓰고 덜 내는 게 문제라는 듯 말이다. 그런데 이게 기후위기와 맞물려있는 문제라 마음이 또 편치 않다.
탄소 배출을 줄이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경로는 화석연료를 태우는 에너지 체제를 바꾸는 것이다. 화석연료 대신 재생에너지를 많이 쓰는 것만으로 달성될 수 없다. 에너지가 무한한 듯 쓰고 버리기를 반복하던 삶의 양식도 바꿔야 한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요금 인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그래서 나온다. 다른 국가들에 비해 한국의 가정용 전기요금은 매우 싼 편이다. 한 국가의 전기사용량을 인구수로 나눈 1인당 전기사용량을 비교하면 한국은 세계 3위다. 익숙한 시장 논리로 두 가지 사실을 연결하면 ‘싸니까 많이 쓴다’는 결론이 굳어지고 ‘덜 쓰려면 요금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고지서에 찍힌 요금만 걱정하는 게 무안해진다.
고지서만 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1인당 전기사용량이 많은 것은 주택용 전기를 많이 써서가 아니다. 산업용 전기를 많이 쓰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한 해 쓰는 전기가 주택용 전기 4분의 1을 넘는다. 개별 기업만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의 경제구조가 에너지 다소비 업종 기업들의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기업을 위해서라면 정부는 언제나 저렴한 에너지 공급을 고심한다. 여론의 눈치는 볼지언정 전기·가스·교통요금이 존엄의 관문이 되는 시민의 삶은 눈여겨보지 않는다.
최근 삼성전자는 반도체 재고가 과하게 쌓여 생산을 줄이기로 했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그만큼 에너지를 낭비했다고 평가되지 않는다. 오히려 전기요금 부담이라도 덜어줘야 하는 게 아닌지 걱정한다. 에너지 절약을 위한 스마트폰 충전 습관은 나오지만 스마트폰 생산을 줄여 에너지 소비를 줄이자는 계획까지 나오지 않는다. 총량을 줄여야 한다는 인식이 높아지는 것에 비해 무엇을 줄여야 할지 논의가 깊어지지 않으니 전기요금만 쳐다보게 된다. 가까이 있는 것이 더 크게 보이는 셈이다.
싸니까 많이 쓰는 게 아니라 많이 쓰게 하니까 많이 쓰는 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엇을 얼마나 만들지 결정하는 힘은 우리한테 있지 않다. 자본에 있다. 경제성장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무엇이든 만들어낸다. 만드느라 에너지를 쓰고 만든 만큼 에너지를 쓰게 한다. 시장 예측을 못해 팔리지 못한 손실은 결국 기업에 돌아가니 상관없다? 아니다. 그 청구서는 기후위기라는 이름으로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비인간 동식물에게 날아오고 있다.
정부는 청구서의 수신지를 바로잡기는커녕 청구서를 부풀리고 있다.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재생에너지 비중을 줄이더니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계획에서는 산업부문 탄소 감축 부담을 줄여주었다. 대신 우리의 삶을 감축하라고 한다. 폐쇄 예정인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들의 삶, 핵발전소 인근 주민들의 삶을 기후위기의 제물로 바친다. 냉난방을 절약하라는 선동은 있으나 기후재난에 방치된 주거대책은 없다. 새만금, 가덕도, 제주에 공항을 짓도록 밀어붙이고 설악산에 케이블카를 허가하면서 생태학살을 부추긴다. 우리는 전기요금 고지서에 찍힌 요금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이미 부담하고 있다.
기후위기는 자본과 정부가 만드는 것이라고 떠밀려는 게 아니다. 내가 사는 세계의 자본, 내가 사는 나라의 정부다. 덜 쓰려면 덜 쓰게 해야 한다. 전기요금 고지서를 보는 대신 나는 기후부정의에 대한 청구서를 들고 세종시로 간다. 4월14일 기후정의파업, 함께 살기 위해 멈춰! 멈추면 비로소 보일 것이다. 기후위기를 멈추려면 자본주의를 멈춰야 한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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