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산의 시선] 아들에게 쓰는 편지
언젠가 너는 내게 시간과 죽음을 말했던 적이 있다. 네가 유치원에 다니던 어느 날, 너는 이렇게 물었다. “아빠. 내 키가 아빠만큼 커지게 되면 아빠는 할아버지가 돼. 그렇지?” 나는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너는 아빠처럼 결혼해서 네 자식을 키우고 있겠지.” 그러자 너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다시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그럼 아빠도 죽어?”
당황했던 나는 ‘아빠는 절대 죽지 않아’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널 지켜보고 있을 거야’라는 뻔한 말은 하지 못한 채 결국 이렇게 답했던 기억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 시간이 그렇게 만드는 거야.”
다행히도 이런 나의 무심한 대답에 너는 모든 걸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문득 나는 세월을 말하는 네가 대견스러웠고, 죽음을 말하는 네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좀 더 근사한 답변을 하지 못한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아빠가 할아버지 되면 내가 업어 줄게”라고 말하며 다시 껑충껑충 뛰어가는 네 목소리에서, 왠지 울음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아.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고 소진되게 마련인 것이어서, 나는 네가 그러한 사실에 아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무엇보다 네 삶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길 바란다. 너도 알게 됐듯이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 역시 언젠가 소멸한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기억은 과거에 머물지만, 시간을 만나 먼 미래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바다는 강을 기억한다. 숲은 나무를 기억한다. 시간도 시간을 기억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했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 그게 바로 영원이고 불멸이다. 이제 너는 불멸의 존재로서 영원히 기억될 너에게 어떤 삶을 바칠 것이니?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시간 앞에 초연하거라. 그것은 시간 앞에 정직하고, 그 엄숙한 흐름에 몸을 맡기라는 뜻이다. 인생의 모든 희로애락은 시간이 빚어낸 산물이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에 우리는 후회를 하고 슬픔에 젖어 들며 더 나은 나 자신을 찾아가게 된다. 다가올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우리는 두려워하면서도 뛰는 심장을 안고 인생길에 나설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시간이 주는 축복이자 아름다운 고통이 아니겠니. 그러므로 너는 시간이 흘러 훌쩍 커버린 너와, 그만큼 늙어버린 아빠의 모습에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마라. 너는 그저 존재 그 자체로서 네 삶의 대지 위로 만개하여라.
그리고 다가올 죽음 앞에 담대하거라. 죽음은 한 세상의 소멸이자 한 별의 탄생이다. 별은 그 안에 간직한 한 인간의 서사를 찬란하게 비추며 그 자리에 타오른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듯, 죽음이 있어야 삶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어느 위대한 철학자가 말한 ‘삶을 완성하는 죽음’이다. 더 이상 돌아보아야 할 곳이 있지 않고, 더 이상 올라가야 할 곳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맞이하는 죽음은 그 얼마나 자유로운 희열일까?
그러니 아들아, 우리 함께 삶의 놀이터에서 별이 뜰 때까지 신나게 놀다 가자. 기쁨과 슬픔의 그네를 타고, 선악을 저울질하는 시소를 타며, 절망의 구름다리를 건너 고통이라는 정글짐에서 빠져나오자.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밤이 찾아오면, 작은 배를 타고 밤하늘에 미끄러져 낚싯대를 드리우자. 그리고 우리 함께 별을 낚자. 그러다 풍덩 뛰어들어 반짝이는 별이 되자. 내가 아는 삶은 언제나 그래왔고, 또한 나의 죽음은 그래야만 한다.
“무엇보다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나는, 느끼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서 살아왔으며 이는, 그 자체로 크나큰 특권이자 모험이었습니다.”(올리버 색스 ‘나의 생애’ 中)
그러므로 너의 아버지는 오늘도 새벽 5시에 일어나 편도 40km를 운전해 출근을 하고, 빌런 같은 후배들과 빌라도 같은 고참들 사이에서 빌빌 기어 다니며 아첨이나 하다가, 늦은 저녁 집에 돌아와 네 엄마에게 심한 바가지를 긁히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일상의 연속에도 내가 나의 하루를 위대하다 느끼는 것은, 나는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내 존재의 이유를 증명했으며, 그로 인해 내 서사를 두터이 하고 별이 되어 타오를 나의 삶에 빛을 보태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나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고 있다. 그런 나를 기억해 줄 네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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