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호우의 정치人] 17대 ‘그때 그 초선’, 백팔번뇌는 계속되고 있다
2004년 3월 중순, 17대 총선을 한 달 앞두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당사를 영등포 폐청과물공판장으로 이전했다. 당시 박영선 대변인이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을 피우겠다”고 논평할 정도로, 이곳은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낡은 건물이었다. 야당인 한나라당도 천막당사 이전으로 맞섰다. 총선 한 달 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탓에 한나라당에는 역풍이 세게 불었다. 이회창 대선자금 수사로 ‘차떼기 당’ 오명까지 뒤집어쓴 한나라당은 컨테이너 건물에서 정치개혁을 약속했다.
영등포 폐청과물공판장 당사 대 천막당사가 맞붙은 17대 총선은 ‘누가 더 몸을 낮추나’라는 읍소 경쟁이었다. 그만큼 기성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분노가 컸다. 총선 결과 초선들이 대거 국회에 등장했다. 초선은 모두 187명으로 무려 62.5%를 차지했다. 그야말로 정치판을 갈아엎는 대형 물갈이가 이뤄졌다. ‘초보운전’에 빗대 ‘초보국회’라는 말도 나왔지만 어느 때보다 유권자들은 정치개혁을 염원했고, 초선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때 그 초선’의 지금 ‘정치적 주소’는 어디일까.
이들은 이제 거물급 인사가 됐다. 국민의힘에서는 김기현 대표와 주호영 전 원내대표가 대표적이다. 지난 3월 전당대회에 출마하지는 않았지만 여론조사에서 민심·당심 1위를 각각 차지한 유승민·나경원 전 의원도, 최근 잇달아 설화 논란을 빚은 김재원 최고위원도 이때 초선이었다. 또 박형준 부산시장, 유정복 인천시장, 정문헌 종로구청장도 있었다. 조경태 의원은 열린우리당에서 당선됐지만 지금은 국민의힘에 몸을 담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초선들 역시 더불어민주당의 중진이 됐다. 김진표 국회의장과 우원식, 우상호, 노웅래, 이인영, 정청래, 유기홍, 이상민, 김태년, 정성호, 윤호중, 조정식, 김영주 등 쟁쟁한 인물들이 이때 금배지를 처음 달았다. 지금 국회·당에서 중책을 맡고 있거나 예전에 맡은 적이 있는 중량급 정치인들이다. 강기정 광주시장, 이광재 국회 사무총장 등도 있다. 이들 대부분은 86세대이다. 운동권 출신이 대거 의회에 진출해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하지만 기대만큼 실망도 컸다. 이들의 정치적 활동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108명의 열린우리당 초선 의원을 빗대 ‘백팔번뇌’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이들의 백팔번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04년 정치개혁 목소리를 높이며 등장한 이들 초선이 지금은 다선 의원이 돼, 내년 총선 국면에서는 물갈이 대상으로 몰리는 역설적 상황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들의 정치적 활동이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폐지하겠다던 국가보안법은 20년 동안 개정조차 못한 채 그대로다. 참여정부 때 내건 교육·언론 개혁은 이후 반대 세력에 밀려 거꾸로 개악됐다. 이들에게는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이나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 같은 소장파의 활약상도 없었다. 대부분 친노-친문-친명으로 이어지는 노선에 참여해 당 지도부에 순응하는 정치를 해왔다. 친명 인사들이 많다는 점이 눈에 띈다. 총선을 앞두고 있는 만큼,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으나, 공천 줄서기로 비칠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에서는 유승민 전 의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대통령·당 대표 권력에 기대어 정치적 자리매김을 했다. 김기현 대표가 자신의 정치력이 아니라, 친윤을 표방하며 대표직에 선출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때 그 초선’들이 정치무대에 등장한 이후 여야 협치의 공간은 더욱 줄어들고 진영 갈등은 더욱 커졌다. 여야 간 모임은 줄어들고 대화와 협상, 조정은 매우 드문 현상이 돼 버렸다. 대신 강성 팬덤이 여의도 정치권을 장악했다. 정치개혁을 부르짖던 이들이 오히려 정치적 팬덤을 부추기고 진영 정치에 앞장서는 볼썽사나운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은 피기도 전에 이미 시들어 버렸다. ‘그때 그 초선’들이 단순히 선수 하나를 더 쌓아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려 하다가는 강제로 뒷방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될 수 있다. 이들이 지금이라도 초심으로 돌아가 여의도 정치 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데 앞장서길 바란다. 당시는 초선이었지만, 현재는 한국 정치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이들에게 주어져 있다. 지금 국회 전원위원회가 열려 선거제 개편을 논의하고 있다. ‘그때 그 초선’들이 당리당략, 개인적 유불리를 벗어나 진정한 선거개혁을 가져올 수 있도록 힘찬 목소리를 내야 한다. 당시 천막당사로 당 현판을 옮기던 때의 비장한 눈빛과 총선 당일 폐공판장의 야외주차장 개표상황실에서 터지던 함성을 기억하고, 그 뜻을 실천한다면 한국 정치에도 따스한 봄날이 올 수 있다.
윤호우 논설위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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