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국무회의 날 김진표 ‘법인세 인하’ 돌출 발언 왜 했을까”

한겨레 2023. 4. 10.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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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참여정부 천일야화 10화 초기 경제팀

2003년 3월4일 김진표 경제부총리

아침 라디오 인터뷰에서

경제참모들 조율없이 ‘법인세 인하’ 언급

기자는 ‘싸움’ 기대했지만 ‘진화’

“관료와 학자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며,

둘 사이 협력이 잘 돼야

정책이 성공하고 정부도 성공한다.”

3월11일 자민련 예방

김종필 총재 ‘5·16 경험’ 들며

“세상 일은 이상만으론 안된다”

2003년 3월4일 오전 노무현(가운데) 대통령이 고건(왼쪽) 국무총리와 김진표(오른쪽) 경제부총리가 배석한 가운데 참여정부 첫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앞서 이날 아침 김 부총리는 방송 인터뷰에서 ‘법인세 인하’ 의사를 밝혀 파문이 일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참여정부 초대 내각의 구성은 전체적으로 개혁적 색채가 강했으나 유독 경제 부처만은 정통 관료 중심으로 보수적이었다. 그때 국민 여론조사에서 그렇게 받아들여졌고, <뉴욕 타임스>에서도 그렇게 평가했다. 그러나 청와대 참모진은 개혁적 정책실장 밑에 재경부 관료 출신권오규 정책수석, 그리고 경제보좌관에는 온건중도파의 조윤제서강대 교수로 짜인 혼성부대였다. 관료들이 장악한 경제부처와 청와대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언론은 많은 기사를 쏟아냈다. 관료 편을 들면서 학자들을 실물경제에 약하다고 폄하하는 기사가 많았다.

2003년 3월4일 참여정부 첫 국무회의 날. 아침 라디오 인터뷰에서 김진표 경제부총리가 느닷없이 ‘법인세 인하’ 발언을 했다. 중요한 경제정책은 경제부처 장관들과 청와대 경제참모들의 회동인 ‘청와대 서별관 회의’를 거쳐 발표하는데, 이 발언은 그런 절차 없이 나왔다. 사실 법인세 인하는 2002년 대선의 쟁점이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법인세 인하를 주장하자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반대했다. 2002년 대선 때 티브이 토론을 보고 있으려니 노 후보가 ‘법인세 인하는 소수의 (재벌)대기업에만 득을 주고 다수의 중소기업과는 상관없다’고 하며 반대했다. 맞는 말이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법인세 인하 이유는 주로 두 가지다. 국내 기업의 투자 촉진과 외국기업의 국내 투자 유치. 그러나 법인세 크기는 기업의 투자 결정과 무관함이 경제학 교과서에 이론적으로 증명되어 있고, 다국적 기업이 국외투자 결정을 할 때 그 나라의 법인세 수준은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실증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그러므로 노무현이 옳았다.

2003년 5월9일 노무현(가운데) 대통령이 김진표(왼쪽) 경제부총리, 이정우(오른쪽) 정책실장과 함께 청와대 국정과제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일부 언론의 예측과 달리, 관료와 학자로 구성된 초기 경제팀은 비교적 호흡이 잘 맞았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그럼에도 경제부총리가 새삼 이 문제를 정권 초기에 꺼내든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부총리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기자 전화가 바로 날아왔다. 나는 “부총리가 투자 유치 걱정에 그런 발언을 한 모양인데, 대통령 생각하고는 다르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라고 대수롭잖게 답했다. 기자는 두 사람 싸움을 붙이고 싶었겠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논란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김 부총리와 나는 불화없이 1년을 보냈고, ‘10·29 부동산 대책’도 잘 협력해서 만들었다.

법인세 해프닝에서 보듯이 관료들은 실무에는 강하지만 이론이나 최신 연구동향에는 아무래도 학자만 못하다. 그러므로 학자들을 가리켜 실물경제 모른다는 식으로 무시하면 안 된다. 사실 실물경제라는 말 자체가 외국에는 없는 이상한 말이다. 관료와 학자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며, 둘 사이 협력이 잘 돼야 정책이 성공하고 정부도 성공한다.

2003년 2월28일 참여정부 초기 경제팀이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첫 회동을 했다. 왼쪽부터 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 윤진식 산자부 장관, 김진표 경제부총리,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 권오규 대통령 정책수석비서관. 필자 제공

3월5일(수) 오후 3시 대통령이 주재하는 새해 예산편성 지침 회의에 배석했다. 참석자는 기획예산처의 박봉흠 장관·변양균 차관·임상규 예산실장·정해방 예산총괄심의관, 재경부의 최경수 세제실장. 보육 소관이 여성부냐 복지부냐, 연구개발(R&D) 예산의 중복·낭비 문제를 집중 토의했다. 이른바 ‘타성예산’이란 것이 있어 3월에 삭감됐다가 8월에 부활하곤 하는데, 예를 들면 민간지원 예산이 그렇다고 한다. 대통령이 가장 낭비가 심한 예산은 어디냐고 물었다. 기획예산처는 ‘농업과 중소기업 분야’리고 답했다. 1년에 9조원 나가는 농업 보조를 400만 농민으로 나누면 1인당 200만원이 넘는다. 두 분야에 특히 지역이기주의, 부처이기주의가 강하다는 것이다.

3월10일(월) 아침 대통령 주재 수석회의를 마치고 권오규·조윤제와 함께 헬기를 타고 과천 정부청사로 날아갔다. 헬기를 난생 처음 타봤다. 10분만에 도착했다. 빠르다. 오전 10~12시 재경부 업무보고에 참석했다. 김영주 차관보가 20분 정도 보고를 하고 난 뒤 토론이 있었다. 변양호 금융정책국 국장이 기억에 남는 발언을 했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 나라 전체로 안전 희구성향이 높아져 금융기관 보유 1천조원의 자산 중 주식은 7조~8조원에 불과하다며 좀 더 진취적인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은 며칠 전 나온 김 부총리의 법인세 인하 발언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했다. ‘국민들이 오해를 할까봐 부총리 발언을 제지했다’고 하면서 ‘조세구조는 전반적으로 공정화·투명화가 중요하므로 전반적인 세제개편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토지보유세를 포함해 세제를 종합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나도 옆에서 거들었다. “부동산 투기를 잡기 위해 토지보유세 강화가 꼭 필요하다. 지금은 경기가 나쁘지만 정권 후반부에는 나아질 것이니 눈앞만 보지 말고 장기적, 구조적 경제체질 개선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3년 3월10일 정부과천청사 국무위원 식당에서 열린 ‘재계 5단체장 상견례 겸 오찬 좌담회’에서 노무현(왼쪽 둘째) 대통령이 김재철 무역협회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맨왼쪽으로 박용성 상공회의소 회장이 보인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이날 낮 12시 과천청사 국무위원 식당에서재계 5단체장과 상견례 겸 오찬 좌담회가 있었다. 김재철 무역협회장이 말하기를, “통상교섭본부장 임기가 외국은 보통 5-10년인데 한국은 1년 반밖에 안 된다. 매번 국제회의에 명함만 돌리고 간다고 소문이 났다”는 것이다. 권오규 정책수석이 동조하면서 경험을 이야기했다. 자신이 경제기획원 시절 미국 담당 과장을 맡았던3년 반 동안 외교부 국장이 4명 거쳐갔고, 지적재산권 담판 때는 미국쪽 협상 상대방이 20년 동안 한국·일본만 전담한 베테랑이어서 상대하기 버거웠다고 했다. 심각한 문제다. 내가 역사 이야기를 한 마디 했다. “율곡부터 이완용까지 조선시대 고위관료들 임기가 짧았다. 평생 관직을 30-40개 거치니 직책 하나에 1년 정도, 따라서 전문성이 낮았다”고 말했다.

그때 쟁점이던 집단소송이 화제에 올랐다. 박용성 상공회의소 회장은 남소(소송남발)를 우려해 집단소송제에 반대하면서 현행법으로도 충분히 처벌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공정위 단속 때 집단소송에 진입토록 하면 남소 방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김효석 의원은 공정위, 금감위가 솜방망이에 불과하므로 집단소송제 도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반론을 폈다. 노 대통령은 “집단소송제를 반년 쯤 시행해보고 남소 우려가 현실화하면 그때 가서 수정하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2003년 3월11일 노무현(왼쪽 셋째)이 김종필(맨 왼쪽) 총재와 변웅전 대변인을 비롯한 자민련 지도부 9명을 청와대에 초청해 만찬을 나누고 있다. 앞서 이날 오전 이정우 정책실장과 초기 경제팀도 김 총재를 예방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3월11일(화) 오후 권오규·조윤제와 함께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를 예방했다. 김 대표는 쾌활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자신의 ‘5·16’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세상 일은 이상만 갖고는 안 되고, 경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실 제이피(JP)한테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특히 1969년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가 왜 찬성으로 돌아섰는지 몹시 궁금하다. 제이피는 세상 떠나기 전 <중앙일보>와 긴 인터뷰를 했는데 이것이 책으로 나왔다. 읽어보니 국민이 궁금해 하는 비밀에 대한 증언, 고백은 없고 자화자찬은 많다. 5·16 직전 불안해서 찾아갔던 점쟁이 백운학의 에피소드는 재미있지만 다른 역사적 증언은 별로 없다. 반대로 3선개헌에 끝까지 반대했던 정구영 회고록, <실패한 도전>(중앙일보사)은 아주 솔직하고 충실한 내용이라 대조적이고, 그 고매한 인품에 존경심이 절로 들었다.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초기 ‘위클리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경제팀의 ‘관상’ 분석 기사. 필자 제공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공원에 자리한 박팽년의 묘. 필자 이정우 교수의 선조 중에 경주이씨 익재공파 이공린이 세조 때 단종복위를 도모한 이유로 멸문지화를 당한 박팽년의 사위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참여정부 초기 경제팀에 관한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났다. <위클리 이코노미스트>라는 신생 경제 주간지에서 어느 유명한 관상가에게 초기 경제팀의 사진을 보여주고 받은 관상평이 실렸다(2003년 3월11일치). 김진표 부총리는 ‘분별력과 대인관계가 좋고 위아래가 다 좋아하는 리더형’, 권오규 정책수석은 ‘폭넓은 대인관계에 분석력이 뛰어나고 진실하며 합리적’, 조윤제 경제보좌관은 ‘성격이 따뜻하고 정직·겸손·원만한 성품’. 그런데 이정우에 오면 확 달라진다. ‘전형적인 원리원칙형, 직관력이 뛰어나고 합리적이지만 개혁 성향이 강한 사육신의 성삼문 형’. 사실 내가 좀 그런 면이 있다. 사진만 보고 내 성격을 알아낸 것이 신기했다.

실제로도 우리 선조 중에 사육신 박팽년의 사위(경주이씨 익재공파 이공린)가 있어 집안이 ‘쫄딱’ 망하고 오랜 세월 벼슬길이 막혔다고 들었다. 20대 시절 우연히 노량진을 지나다가 ‘사육신 묘’ 팻말이 있기에 올라가본 적이 있다. 성삼문, 박팽년 등의 묘가 눈앞에 나타나 깜짝 놀랐고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만고충절에 존경의 절을 하고 내려왔다. 전설에 의하면 김시습이 사육신의 주검을 수습해 나룻배로 한강 건너 노량진에 묻었다고 한다. 오래 뒤 다시 가보니 초라했던 묘가 거대한 호화분묘로 바뀌어 있어 실망스러웠다. 사육신 묘는 원래의 작고 초라한 묘가 어울린다.

필자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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