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미 CIA 용산 안보실 도청, 사과·재발방지 약속 받아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한국 정부를 도청한 내용이 담긴 기밀문건의 유출 파장이 확산하고 있다. 문건에는 외교·안보 컨트롤타워인 국가안보실 대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실이라면 충격적이다. 한·미 동맹 근간인 신뢰와 국가안보 차원에서 흐지부지 넘길 일이 아니다. 정부는 사안의 심각성을 직시하고,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유출된 기밀문건은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 등이 담긴 100여건이다. 한국·프랑스·이스라엘 등을 도·감청한 정황도 들어 있다. 문건에는 지난달 초 당시 김성한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외교비서관이 미국이 요청한 ‘우크라이나 포탄 지원’ 문제로 대화한 부분이 있다. 이 비서관이 “살상무기 지원 금지 원칙을 어길 수 없다. 유일한 선택지는 원칙을 바꾸는 것”이라고 언급하자, 김 실장은 미국 요구에 응하면 ‘미국 국빈방문’과 ‘포탄 지원’을 맞바꾼 것으로 비칠 수 있다며 155㎜ 포탄 33만발을 폴란드에 우회 판매하는 방안을 거론했다. 문건에는 대화 내용 출처가 ‘신호정보 보고’로 돼 있다. 한·미 간 정보 공유가 아니라, 전자장비를 통한 스파이 활동으로 정보를 취득했다는 뜻이다. 실명과 수치까지 적혀 있어 회의 내용이 통째로 도청됐을 개연성이 있다. 미국이 한국 대통령 집무실과 청사 내 각종 회의를 수시로 도청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 국방부는 문서 유출 경위 조사에 착수했지만 도청 여부와 문건 진위는 답변을 피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 관리들은 문건이 위조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2013년에도 에드워드 스노든이 국가안보국(NSA)이 우방국 정상 등을 감시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동맹국 정상의 도·감청 중단을 약속했지만 거짓말이 된 셈이다.
대통령실은 10일 미국 조사 결과를 지켜본 뒤 “합당한 조치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도청이 맞다면 심각한 주권 침해 사안이다. 미국 발표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은 지나친 저자세 아닌가. 대통령실이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과장하거나 왜곡해서 동맹 관계를 흔들려는 세력이 있다면 많은 국민에게 저항받게 될 것”이라고 윽박지르는 태도는 온당치 않다. 굳건한 동맹은 신뢰가 바탕이다. 이런 사안일수록 정공법으로 대처해야 한다. 정부는 미국에 유출된 기밀 내용·규모·경로 등에 대한 경위 설명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미국은 성의 있는 자세로 답해야 한다. 도청이 확인된다면 정부는 분명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도 받아내야 한다.
대통령실은 지난해 용산 이전 당시 여야 의원들이 도청 우려를 제기했지만 추가 보완 없이 일정대로 밀어붙였다. 시간에 쫓겨 무방비로 옮겼다는 ‘졸속 이전’ 시비는 계속되고 있다. 대통령실은 “청와대보다 대통령실이 더 안전하다”고 했지만, 안보실 도청 의혹이 제기된 상황에서 그렇게 강변할 일이 아니다. 대통령실은 국민들의 의구심이 없도록 면밀한 청사 보안 점검부터 실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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