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때 젊은이들 희생이 우리 사회의 밑거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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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때 내가 겪었던 일은 평생토록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그 젊은이들의 희생이 오늘 우리 사회의 밑거름이 됐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979년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을 북한 지령에 의한 과격분자들의 만행으로 왜곡시키기 위해 경찰이 조작한 '사제총기 사건'의 피해자인 정광준(66·사진)씨가 처음으로 진상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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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진상규명위 조사…44년 만에 증언
항쟁 주도 고 김종철씨의 친구 ‘이유’
“계엄사 끌려가 고문…지금도 고통”
“부마민주항쟁 때 내가 겪었던 일은 평생토록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그 젊은이들의 희생이 오늘 우리 사회의 밑거름이 됐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979년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을 북한 지령에 의한 과격분자들의 만행으로 왜곡시키기 위해 경찰이 조작한 ‘사제총기 사건’의 피해자인 정광준(66·사진)씨가 처음으로 진상을 공개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10일 경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부마민주항쟁 사제총기 조작 피해자 정광준씨 증언 기자회견’을 열었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부산과 경남 마산(현 창원시)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다. 항쟁이 한창이던 1979년 10월20일 최창림 마산경찰서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시위현장인 마산 창동에서 사제총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최 서장은 손잡이 없는 길이 15㎝의 총기를 공개했으나, 대부분 기자들은 믿을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경찰은 같은 달 23일 오후 창원공단의 자동차부품 제조업체인 삼성라디에이터 직원 정광준씨를 사제총기 제작혐의로 체포해, 부산에 있던 부마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로 연행했다. 정씨는 부마민주항쟁의 핵심인물 가운데 한 명인 김종철씨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김씨는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다 42살이던 1997년 숨졌다. 정씨는 라디에이터 핵심 부품인 스프링 등의 성능을 관리하는 품질관리계 소속이었는데, 경찰은 사제총기 제작 증거로 정씨 책상에서 나온 스프링을 제시했다.
“수사관들은 며칠 동안 온몸을 구타하고 잠을 재우지 않으며 무조건 진술서를 쓰라고 강요했어요. 나는 직장 생활 때문에 데모에 참가하지 않았어요. 왜 잡혀 왔는지, 무엇을 쓰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죠. 진술서를 몇번이고 다시 쓰라고 한 뒤에야, 내가 사제총기를 제작해 간첩인 김종철에게 전달했다고 쓰라더군요.”
정씨는 “강요하는 대로 내가 사제총기를 만들었다고 쓰면 내가 죽고, 종철이를 간첩이라고 쓰면 종철이가 죽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런데 어느날 합동수사본부는 갑자기 조사를 멈추고 잠을 자게 해줬다. 박정희가 죽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는 2003년 미국으로 이민 갔고, 지난해 가을에야 ‘사제총기 사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오는 13일 부마항쟁진상규명위원회 조사를 받기 위해 최근 긴급히 귀국했다. 진상규명위는 ‘사제총기’가 진해에 주둔한 미 해군의 조명탄이라는 사실을 지난해 말 밝혀냈다.
“고문 후유증으로 지금도 왼쪽 무릎이 아픕니다. 잡혀가서 풀려날 때까지 내가 기억하는 날짜와 시간은 다소 착오가 있을 수 있겠지만, 떨어지지 않는 고통은 당시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합니다.”
정씨는 “10·26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이렇게라도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16일 부산, 10월18일 마산에서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은 부산에 비상계엄령, 마산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공수부대 등 군인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했다. 부산 1058명, 마산 505명이 연행돼 87명이 군법재판에 넘겨졌다. 결국 박정희는 그해 10월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고, 유신정권은 막을 내렸다. 정부는 지난 2019년 부마민주항쟁 40돌을 맞아 첫 시위가 일어났던 10월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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