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과학기술 도약, 연구행정도 달라져야
연구 현장에는 연구 이외에도 연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많다. 동료 연구자가 그렇고, 부서장과 같은 연구책임자도 그렇다. 내가 연구책임자라면 나를 도와 연구를 함께 수행하는 연구원이 있을 것이다. 출퇴근 시간처럼 연구 생활을 규정하는 규칙도 있을 테고, 다양한 업무처리에 필요한 복잡한 행정절차도 있을 것이다.
가끔은 연구비 정산이나 감사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지적을 받아 본 경험도 있을 것이고, 연구수당 같은 인센티브 때문에 속이 탔던 적도, 그리고 기대와는 달랐던 평가 결과 때문에 마음이 상했던 적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연구자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연구 아닌 것들은 어떤 점에서는 연구자에게 연구 활동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연구기관의 연구자들이 이직하는 이유 중의 많은 경우가 이런 연구 아닌 문제 때문이다. 이처럼 연구자가 누구와 함께, 또 어떤 방식으로, 어떤 시스템 안에서 연구하는지에 대한 것이 연구행정이 다루는 핵심적인 영역이다.
우리나라는 연구행정에 대한 인식과 역량이 다소 취약한 편이다. 그 원인은 과학발전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서구 유럽은 16세기부터 본격적인 과학발전이 시작되었고 발전한 과학기술을 토대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즉, 과학연구에 대한 인식과 철학이 오랜 시간 동안 성숙하여 온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20세기 중반 이후 산업과 과학 성장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기에 산업과 구분될 만큼 과학연구에 대한 인식이 갖추어지지 못했다. 특히 선진국에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도 연구행정 분야는 거의 들여오지 못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국가행정 시스템을 연구사업 운영 방식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이는 결국 가장 혁신적이어야 할 과학기술 연구사업을 가장 보수적이어야 할 국가 재정관리 방식으로 관리하게 된 모순을 불러오게 된다. 즉, 혁신이나 창의성보다는 부정부패의 예방과 도덕적 해이 방지가 연구행정의 중심 철학이 된 것이다.
2000년대 이후에는 그간 급성장한 대기업의 효율성 중심의 경영 기법이 출연연구기관을 중심으로 무분별하게 활용되면서 연구 현장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규정 기반의 경직된 행정 절차와 원가절감 차원의 효율성 중심 경영관리 방식은 높은 수준의 자율성과 유연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연구 활동을 여러 측면에서 제약하며 연구자의 창의적 자유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과학연구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상반되는 제도의 운용은 많은 연구자를 혼란스럽게 하였고, 결국에는 이 제도에 적응한 적당하고 안정적인 성과에 타협하는 연구자를 만들어냈다. 실제로 몇 년 전 논쟁거리가 되었던 '연구사업 성공률 98%의 미스터리'는 이를 방증하는 씁쓸한 사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이미 세계적으로 우수한 과학자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고, 연구 장비나 시설 또한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으며, 사용되는 연구비 또한 GDP와 비교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따라서 이제는 각각의 요소를 더 우수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이 요소들이 어우러져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제도와 시스템 개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나라 과학연구의 특성을 반영할 수 있는 연구 행정제도의 설계와 운영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연구와 행정·경영을 모두 이해하고 조화롭게 구성할 수 있는 연구행정 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그간 연구행정 분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었기에 이러한 접근보다는 연구자 애로사항 해결 중심의 개선 노력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연구 현장의 큰 변혁을 끌어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제 연구행정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말 대덕 특구를 중심으로 연구행정 전문가들의 모임인 '연구행정연구회'가 결성되었고 우리나라 연구행정 분야의 발전과 역량 강화를 위한 많은 의견이 활발히 오가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앞으로 꾸준히 지속돼 연구행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확산과 많은 연구행정 전문가가 육성되어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새로운 도약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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