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가 전우원을 안아준 이유
[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 이주현 | 뉴스총괄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27)이 연일 광주에 대한 사죄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경찰에서 마약 혐의 조사를 받고 풀려나자마자 광주에 내려간 전우원은 지난달 31일 5·18 희생자 어머니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고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했다. 그는 이후에도 각종 언론 인터뷰를 통해 전씨 일가의 비리를 폭로하고 “나는 죄인”이라며 머리를 숙였다.
난감했다. 도대체 ‘전두환 손자’가 왜 갑자기 ‘옳은 말’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어서였다. 그간 공개된 전우원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모든 사람이 복종하고 떠받드는 할아버지에게 거부감을 가졌으며, 어머니를 버리고 이중 결혼한 아버지를 혐오한다. 검은돈으로 호화 생활을 즐기는 친척들을 수치스러워하고, 특히 5·18에 짙은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 어른이 돼 미국에서 만난 광주 사람들(또는 룸메이트)로부터 1980년의 진실을 전해 들으면서부터라고 한다. “광주는 폭동”이라는 가족들의 일관된 주장이 거짓말임을 깨달은 것인데, 본인 역시 가족의 죄악을 방치한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특기할 만한 점은 전우원의 고백에 자리잡은 깊은 죄의식이다. 그는 왜 아버지를 ‘전재용씨’라고 부르냐는 질문에 ‘그들이 옳지 못하기 때문’이라면서 ‘하느님 아버지 외엔 다른 아버지가 없다’고 했다. 이는 ‘하느님 아버지 앞에선 모두가 죄인이다’→‘죄를 모르는 죄인은 더 죄가 크다’→‘그 후손 역시 죄인이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본인 스스로 하느님을 통해 회개했다고 밝혔던바, 그를 사로잡고 있는 건 일종의 ‘종교적 신념에 따른 죄책감 또는 강박’(Scrupulosity)으로 보인다. 종교적 죄책감은 심리적 불안정이나 정신적 질환보다는 더 긍정적인 의미에서 양심의 문제와 관련 깊다고 볼 수 있다.
깊은 우울증으로 고통받았고 한때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했다는 전우원에게 아마도 종교는 참회라는 돌파구를 열어준 것 같다. “저라는 어둠을 빛으로 밝혀주셔서 감사하다”고 5·18묘지 방명록에 썼듯, 광주행 이후 인터뷰 영상에서 그의 얼굴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그는 조만간 다시 광주에 내려가서 다른 희생자 가족들에게 계속 사과하면서 그들의 아픔을 “보듬고” “어루만지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광주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인 것일까? 전우원의 눈물은 광주를 어루만진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전우원이 사과의 주체로서 타당하냐는 물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전두환의 손자라는 운명은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할아버지의 죄와 손자는 상관이 없다. 전두환이 5·18 피바람을 일으키며 획득한 권력과 부정한 방법으로 쌓은 막대한 부를 가족의 일원으로 누린 것은 사실이지만, 의식적으로 이런 조건을 적극 활용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는 대표성도 없다. 전두환의 피를 물려받았으나, 현재 전우원의 처지는 가족 안에서 비주류 중의 비주류다. 그의 사과는 전씨 일가의 사과라는 상징성을 띨 수 없다.
광주가 이를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전두환은 회개는커녕 평생 광주를 능멸하다 죽어버렸다. 학살자의 사과는 불가능해졌고, 해원의 꿈은 영원한 폐허로 남았다. 그럼에도 광주의 어머니들은 전우원을 따뜻하게 품었다. 손을 잡았고 등을 토닥였다. 힘내라고 ‘드링크’도 건넸다. 전우원을 끌어안고 흐느끼던 한 유족은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아팠겠니, 여기까지 오느라고….”
광주는 용서한 게 아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외면하는 폭력, 상처를 숨겨야 하는 설움… 40여년 동안 켜켜이 쌓인 그 아픔이, 가족 간 불화, 죄의식이라는 어둠 속에서 헤매는 전우원의 아픔을 알아본 것이다. 사죄와 용서의 구도는 애초부터 성립하지 않았다. 고통을 이해하는 더 큰 고통이 있을 뿐이다.
가해자의 사과가 불가능해진 자리. 이제 유일하게 남은 문제 해결 수단은 ‘청산’일 것이다. 틈날 때마다 5·18을 조롱하는 세력, 그리고 이들을 침묵으로 용인하는 권력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단죄하는 것. 피해자에게 또다시 가해하는 무한반복의 역사적 고리를 단호히 끊는 것. 전우원의 ‘사과’를 지켜보며 드는 생각이다.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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