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과잉의 시대
[숨&결]
[숨&결] 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관심 경제의 시대다. ‘좋아요’가 권력이자 돈이 되니 콘텐츠 생산자는 어떻게든 대중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심리학은 인기 콘텐츠다. 사람의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성격유형 검사 엠비티아이(MBTI)가 인기를 끌고, 일이 조금만 안 풀려도 심리상담가를 찾는다. 심리학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는 유튜버와 책이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그런데 인간 심리는 복잡하다. 복잡한 걸 간단하게 설명하자니 무리가 따른다. 한두가지 개념에 모든 걸 끼워 맞추려고 한다. ‘심리적 상처’를 뜻하는 트라우마(trauma)란 말이 만능열쇠가 된 배경이다.
불안장애와 우울증에서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와 물질 남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신질환을 트라우마로 설명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다. ‘국민 멘토’를 자처하는 육아 전문가들은 부모가 이런 말, 저런 행동에 아이가 트라우마를 입는다고 경고한다. 부모와 교사는 혹시라도 아이에게 트라우마를 입힐까봐 전전긍긍하고, 언론은 사건만 터지면 ‘사회적 트라우마’ 운운한다. 삶의 모든 문제는 어린 시절 내면아이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이비 이론이 상담 분야 주류가 된 지 오래다. 조현병이 부모가 입힌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믿음도 넓고 깊게 퍼져 있어 환자가 병을 이겨내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자 미국 각지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뉴욕으로 몰려들었다. 엄청난 재난 뒤 수많은 트라우마 환자가 발생할 것에 대비한 조처였다. 무료 심리상담을 제공한다고 적잖게 홍보했지만, 놀랍게도 서비스를 이용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유명한 심리학자인 조지 보나노는 <트라우마의 종말>(The End of Trauma)에서 이 에피소드와 함께 후속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해외 파병 미군 10만명 이상을 조사한 결과, 전투 트라우마를 겪은 비율은 17%에 불과했다. 83%는 거의 또는 전혀 증상을 겪지 않았다. 군사훈련 덕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연구팀은 사고나 범죄를 당해 외상센터로 이송된 사람들을 들여다봤다. 역시 62~73%는 거의 증상을 겪지 않았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 중에도 절반 이상이 수개월 이내에 완전히 회복됐다. 자연재해, 성폭행, 총기난사 피해자 모두 마찬가지였다.
트라우마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은 분명 존재하며, 반드시 적절한 지원과 도움을 받아야 한다. 나도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한 뒤 수년간 트라우마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안다. 사실 트라우마를 뜻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는 진단명 자체가 전쟁에서 심한 정신적 상처를 입은 사람의 고통을 의학 영역으로 끌어들여 치료와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탄생했다. 그러나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면 트라우마를 겪지 않는 수많은 사람의 경험을 외면하게 된다.
트라우마에 대한 오해는 대중문화의 영향으로 등식의 한쪽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해나 사고, 폭력의 맞은편에는 인간이라는 거대한 대립 항이 버티고 있다. 인간은 외부의 충격에 무력하게 나부끼는 존재가 아니라, 주체성을 지니고 대처한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은 다르다. 큰 고난을 맞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 충격을 느끼지 않거나 충격에서 바로 빠져나오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경험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지나치게 트라우마를 우려한다. 조그만 일에도 트라우마를 입을 거라고,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상업적 대중심리학의 영향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이런 믿음이 자기실현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의 모든 어려움이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자칫 헤어나지 못한다. 단지 나쁜 기억을 트라우마라고 믿는 건 아닌가? 또 트라우마라고 해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은 아니다.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시간에 따라 점차 회복되며, 자신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할 수 있는 일을 차근차근히 해내면 훨씬 빨리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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