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 인사이트] 중국, 사우디-미국 빈틈을 노린다

김덕식 기자(dskim2k@mk.co.kr) 2023. 4. 1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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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한 이븐 사우드 당시 국왕과 만나 사우디 아라비아는 미국에 석유를, 미국은 사우디에 안보를 보장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양국의 우정이 최근 흔들리고 있습니다. 원인은 80년 동안 양국 관계의 핵심이었던 석유입니다.

4월 2일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OPEC 주요 산유국들의 협의체인 OPEC+는 기습적으로 원유 감산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이 소식에 전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사우디 에너지부는 5월부터 사우디 원유 생산량이 하루 50만 배럴 감소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UAE도 5월부터 연말까지 14만 4000배럴 감산에 돌입합니다. 이라크와 쿠웨이트, 오만, 알제리, 카자흐스탄도 자발적 감산에 동참합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OPEC+ 회원국이 발표한 이번 추가 감산량을 합하면 116만 배럴에 달합니다. 이번 감산은 지난해 10월 OPEC+ 회의에서 결정된 대규모 감산 정책과 별도로 실행되는 추가적인 조치입니다. 앞서 OPEC+는 지난해 10월 하루 원유 생산량을 단계적으로 하루 200만 배럴 줄이기로 합의했었습니다.

OPEC로고
OPEC+의 감산 소식은 국제유가를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OPEC+의 감산이 발표된 직후 국제유가는 3일 거래가 시작하자마자 전 거래일보다 8% 뛰었습니다. 올해 연말 원유 가격 전망치도 올랐습니다. 골드만삭스는 원유 벤치마크인 브렌트유 가격이 올해 연말 배럴당 95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이는 기존 전망치 90달러에서 5달러 올린 셈이다. 사우디가 주도하는 OPEC+의 이번 감산 결정으로 인한 국제유가 급등으로 인플레이션 전쟁을 펼치고 있는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게 됐습니다.

사우디 실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탈미국 행보가 가속화하고 있는 모습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여러 차례 원유 증산을 요구했지만, 반대 결정을 했기 때문이죠. 블룸버그는 이번 OPEC+의 감산 조치가 바이든 행정부와 사우디 간의 새로운 긴장을 불러올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사우디가 미국과의 협력 대신 중국 및 러시아 편에 서면서 신냉전 구도가 확연해진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헬리마 크로프트 RBC캐피털마켓 수석 상품전략가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이번 합의는 사우디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며 “중국에 밀착하고 있는 사우디가 ‘더 이상 단극의 세계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미국에 보냈다”고 설명했습니다.

미국은 OPEC+가 지난해부터 감산 방침을 고수한 것에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국제 유가가 큰 폭 상승하면서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미국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원유 판매 수익을 제한하기 위해 증산이 불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AP통신은 이번 감산 조치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금고를 채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이 러시아의 원유 수익을 제재와 가격 상한제 등을 통해 줄이려 노력했지만, OPEC+는 감산으로 원유 가격을 지탱하도록 했다”며 “이번 감산 결정은 한때 신뢰할 수 있는 미국의 안보 파트너였던 사우디가 미국과 에너지 정책에서 대립하는 순간을 의미한다”고 전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앞서 OPEC+ 회의가 열리기 전 사우디를 상대로 감산하지 말아 달라는 압박을 가해 왔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7월에도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직접 만나 증산을 요청했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 같은 해 10월 미국 중간선거를 코 앞에 두고 감산을 주도하며 양국 관계가 더욱 악화했습니다.

지난해 7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주먹 인사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빈살만 왕세자의 이러한 결정에는 자신이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비전2030’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분석도 제기됐습니다. 중동 전문가인 크리스티안 코츠 울리히센 라이스대 베이커공공정책연구소 연구원은 AP통신에 “빈살만 왕세자의 야심 찬 대규모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높은 유가를 유지하기로 한 것”이라며 “사우디 자국의 이익이 글로벌 파트너와 관계보다 우선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에 도달하자 사우디는 프로젝트 추진에 속도를 냈습니다. 2014년부터 시작된 유가 급락으로 8년 연속 재정 적자를 기록한 사우디는 지난해 유가 상승에 힘입어 280억 달러에 달하는 재정 흑자 전환에 성공하기도 했죠. 하지만 각국 중앙은행들의 긴축 기조와 실리콘밸리은행 사태 등 은행발 위기가 고조되면서 원유 수요가 줄어들었습니다. 이는 유가에도 타격을 줬습니다.

사우디는 미국 등 서방에서 벗어나 독자 노선을 택하고 있습니다. 서방의 제재를 받는 중동 국가들과 관계 회복에 속도를 내는 점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죠. 아랍연맹 정상회담 개최국이기도 한 사우디는 회담에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초청할 예정입니다. 현재 시리아는 2011년 내전 발생 후 아랍연맹에서 퇴출당한 상태입니다. 중국 중재로 관계 정상화에 합의한 이란과는 정상 회담을 추진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왕이 중국 정치국위원 겸 중국공산당 중앙외사공작위원회판공실 주임(가운데)이 지난달 10일 베이징에서 무사드 빈무함마드 알아이반 사우디 국가안보보좌관, 알리 샴카니 이란 최고 국가안보위원회 위원장과 사우디-이란 관계 정상화에 합의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빈살만 왕세자와 바이든 대통령 간의 개인적인 문제도 양국 관계 악화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사건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있는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잔혹하게 살해됐습니다. 배후로 빈살만 왕세자가 지목됐습니다. 이를 두고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유세 과정에서 사우디를 ‘왕따’ 시키겠다고 빈살만 왕세자를 향해 경고장을 날렸습니다. 인격적인 모독을 당한 빈살만 왕세자와 바이든 대통령 사이 관계가 회복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미국과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는 중국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미국에만 의지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사우디는 최근 중국이 주도하는 상하이협력기구에 부분 가입하기로 했습니다. 상하이협력기구는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다자 협의체입니다. 또 페트로달러 체제를 위협하기도 합니다. 중국이 사우디에 무역 대금 결제용 위안화를 풀었기 때문입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목표인 페트로 달러 체제 붕괴에 한 발짝 다가간 조치로 해석됩니다.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마땅한 보복 수단이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우디를 적대시하다가는 중국에 더욱 밀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전략비축유 방출도 뚜렷한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은 현재 전체 용량의 절반 수준인 3억 7100만 배럴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치솟는 유가를 안정시키느라 약 1억 8000만 배럴의 전략비축유를 방출했습니다. 비축유를 방출하더라도 주요 산유국들이 이번처럼 기습 감산이라도 하면 원유 가격을 잡지 못하고 전략비축유만 낭비하는 상황이 빚어질 수 있습니다.

셰일업체 활용도 힘듭니다. 1년도 되지 않는 기간 국제유가가 배럴당 60달러에서 100달러를 넘을 정도로 변동성이 커지면서 셰일업체들은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한 증산에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블룸버그는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이상 치솟았을 때 바이든 대통령이 나서서 증산을 요구했지만, 셰일업체는 이를 거부했다”면서 “이번에도 바이든 행정부는 국내 석유산업을 강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상황은 백악관 반응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전략소통조정관은 OPEC+의 결정에 비판하면서도 “지난 80년간 그랬듯 사우디는 여전히 전략적 파트너”라면서 “사우디와 미국이 서로 항상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략적 파트너 관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습니다. 지난해 10월 OPEC+가 200만 배럴 감산을 결정했을 때 ‘근시안적 결정’이라던가 ‘후과가 있을 것’이라는 발언과 비교하면 수위를 한층 낮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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