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빅테크 뛰는데 … 벤처정신 사라진 판교, 노조 깃발 펄럭

황순민 기자(smhwang@mk.co.kr), 고민서 기자(esms46@mk.co.kr), 김대기 기자(daekey1@mk.co.kr) 2023. 4. 1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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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판교에 위치한 한 정보기술(IT) 회사에서 개발자로 근무 중인 A씨(30대)는 최근 고민 끝에 회사 노조에 가입했다. '회사가 마음에 안 들면 이직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일해왔지만 요즘 얼어붙은 시장 상황 탓에 '자리 지키기'가 우선이라는 판단이 들어서다. 그는 "원하는 연봉 수준으로 이직하기 쉽지 않은 분위기가 팽배해지면서 노조에 가입하는 조직원이 부쩍 많아졌다"며 "회사를 오래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노조를 통해 처우 개선 목소리를 내려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네이버·카카오(네카오)와 대형 게임회사 등 국내 IT업계 구직 시장에 한파가 몰아치면서 노조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다.

비대면 특수와 저금리로 인한 유동성 잔치, 개발자 구인 대란 속에 대규모 채용 경쟁을 벌였던 IT기업·스타트업들이 절대적 고정비용인 인건비 관리에 돌입하면서 시작된 변화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시기에 대규모 채용, 인건비 상승을 주도해온 대형 IT 플랫폼 회사와 게임사, 스타트업들까지 비용 효율화 작업에 착수하면서 '판교=노조 무풍지대' 공식이 깨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엔데믹(감염병 주기적 유행) 국면에서 '복지'로 여겨졌던 재택근무가 해제되는 회사가 늘면서 직원들 불만이 쌓이고 있다. 하지만 고액 연봉을 좇아 잇따랐던 개발자 이직이 뜸해진 데다 성과 보상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까지 더해지면서 입장을 대변해줄 노조를 찾는 직원들이 늘고 있는 분위기다.

10일 엔씨소프트에 노동조합 '우주정복'이 설립된 것은 이 같은 판교 변화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는 분석이다. 우주정복은 넥슨, 스마일게이트, 엑스엘게임즈, 웹젠에 이은 게임업계 다섯 번째 노조로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산하로 결성됐다.

업계에서는 한국 게임업계를 대표하는 엔씨소프트에 노조가 설립된 만큼 제6, 제7 노조 등장이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동안 IT 회사들은 업계 특성상 다른 업계보다 직원 결집력이 낮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IT 업계는 노조 설립이 2018년 이후로 전체 산업권을 통틀어 늦은 편이었지만 지금은 가장 빠른 속도로 노조 입지가 커지고 있다.

카카오 노조는 지난해 말부터 빠르게 가입률이 치솟으며 현재 본사 기준 가입률이 50%에 근접했다. 현재 카카오 노조 집계상 본사 기준 1900여 명이 노조에 가입한 것으로 파악된다. 2018년 10월 약 100명으로 시작한 노조는 2020년 500명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2021년 말 이후부터 급속도로 노조 가입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현재 본사는 물론 계열사를 포함한 카카오 공동체 전체 노조 가입자는 약 4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포털·게임업계를 넘어 스타트업 등 IT 업계 전반으로 노조 영향력이 커질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과거 조직에 불만이 생기면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모색했던 직원들이 이제는 노조를 통해 회사 내 권리를 주장하는 분위기가 일상화됐기 때문이다.

판교 한 기업에 재직 중인 IT 개발자는 "재택근무 해제, 성과급 삭감 등 회사 처우가 나아지고 있지 않지만 요즘엔 이직도 사실상 어려운 분위기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입장을 대변해줄 수 있는 노조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스타트업 재직자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과 벤처정신을 좇아 스타트업으로 옮긴 고급 인력들이 시장에 쏟아져나오고 있는데 이를 받아줄 자리가 많지 않은 상황"이라면서 "구조조정에 몰린 스타트업 재직자들 목소리를 대변할 수단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미국 빅테크와 대비된다.

미국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세계 경기침체 기조가 짙어지자 선제적으로 연달아 대규모 인력 감축을 단행하고 있다. 늘어난 인건비 부담을 덜고 경영을 쇄신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유휴 인력이나 저성과자에 대한 핀셋 구조조정이 어려운 국내 기업들은 인건비 절감과 인력 운용을 놓고 고민에 빠진 모습이다. 이러한 부담을 제때 덜지 못한다면 경쟁력을 잃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구글, 메타, 아마존 등 글로벌 기업들은 일찌감치 대규모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사양 산업은 정리하고 신사업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신속하게 신사업 쪽으로 전환하는 것인데, 한국 여건은 그렇지 못해 1~2년 뒤에 글로벌 경쟁력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픈AI와 손잡고 인공지능(AI) 열풍을 몰고 온 마이크로소프트(MS)다. MS는 돈이 안 되는 사업을 정리하면서 올해 밝힌 감원 규모만 1만명에 달한다. 그러면서도 오픈AI에 대략 100억달러를 투자할 것으로 알려지는 등 AI에 대한 막대한 자금을 퍼붓고 있다.

한편 한국 개발자 채용시장 큰손인 IT 대기업들은 채용 기조에 브레이크를 밟으며 인력 거품을 빼고 있다. 인력 적체 문제로 비상이 걸린 네카오는 일단 비용 효율화 차원에서 효율적인 채용 관리로 대응에 나서고 있다는 전언이다. 국내 대표 상장 게임사(크래프톤·넷마블·카카오게임즈·펄어비스)는 지난해 직원 평균 임금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줄어들었다. 매년 치솟는 인건비가 수익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자 게임사들이 예년과 같은 일괄적인 대규모 임금 인상 대신 개인별 성과 측정과 성과 연동 인센티브 집행 등으로 임금 효율화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황순민 기자 / 고민서 기자 / 김대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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