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포럼] 동맹에 갑질한 국가의 몰락
무리한 보조금 조건에
동맹국 기업 좌불안석
펠로폰네소스 전쟁서
패배한 아테네 돌아보길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주장한 역사 철학자는 크로체와 콜링우드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 H 카는 랑케의 '있는 그대로의 역사'라는 개념까지 포용해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의 말처럼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바람직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 인식도 비슷했다. "내가 기술한 역사에는 설화가 없어서 듣기에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며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 세계를 양분했던 패권국 아테네의 실패 과정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한 축을 이룬다. 그리스 연합군이 대제국 페르시아를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이끌었다. 페르시아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결성된 동맹은 시간이 갈수록 아테네의 갑질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 동맹 도시들을 착취하며 아테네는 패권국 행세를 했다. 아테네가 무리하게 시칠리아 원정에 나섰다가 대패한 뒤 갑질에 대한 역풍이 거세게 불었다. 아테네의 힘이 약해지자 동맹 도시의 반란이 들불처럼 퍼졌다. 아테네는 가까스로 연명하다가 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미해전에서 스파르타 해군에 대패하며 몰락했다. 동맹에 갑질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다.
미국이 중국을 배제하기 위해 공급망과 무역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 기업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 반도체지원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대표적이다. 미국 정부가 발표한 두 법의 세부 조건을 보면 보조금을 빌미로 갑질한다는 오해를 살 만한 내용이 적지 않다. 반도체지원법은 보조금을 받으려면 예상 현금흐름과 예상 이익, 대차대조표 등 세부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이 중에는 영업 기밀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이럴 바엔 보조금을 받지 않는 것이 속 편할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보조금을 받지 않겠다는 것은 미국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중국에도 대규모 생산시설을 두고 있다. 미국이 반도체 장비 대중(對中) 수출을 막으면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된다. 미국이 반도체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민감한 데이터를 제출하더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보조금을 받아야 하는 처지다.
지난해 8월 시행된 IRA는 북미에서 전기차를 조립하고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양극재와 음극재 등 배터리 핵심 광물을 추출 또는 가공해야 보조금을 준다는 게 골자다. 한국 배터리 기업은 중국과 인도네시아 등 미국과 FTA를 맺지 않은 국가에서 광물을 조달하고 있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달 31일 공개된 세부 지침에 한국에서 가공하면 보조금을 받을 수 있도록 조건이 완화돼 한숨을 돌렸지만 부담은 남아 있다. 보조금 배제 대상이 되는 '우려국가'에 중국이 포함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2025년까지 중국 광물을 대체할 공급망을 찾아야 하는데 만만치 않은 과제다.
마틴 울프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는 "미국이 중국과 벌이는 무역 전쟁에서 비싼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내에서도 동맹국에 대한 갑질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 연방 하원은 재닛 옐런 재무장관에게 "IRA가 동맹국에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미국이 아테네와 같은 길을 가는 것은 불행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오는 26일 한미정상회담에서 이런 우려를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
[장박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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