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리그테이블]②불황 속에도 투자 늘리는 이유
지난해 한국 산업계는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였다. 코로나19 여파가 가시지도 않은 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겹쳐 공급망 악화가 이어졌다. 중국의 봉쇄정책에 산업계 기반이 흔들린다는 우려까지 나오며 악화일로의 상황을 마주했다. 분명 힘들었던 한 해였지만 기업들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불확실성에 대비한 총력전 속 변화와 성장도 있었다. 비즈워치는 삼성·SK·현대자동차·LG·한화 등 5개 기업군을 선정, 사업보고서를 통해 △실적 △투자 △부채비율 △연봉 △이사진 △배당 정보를 기반으로 지난해 사업현황과 나아갈 길을 집중 분석했다.[편집자]
▷관련기사: [산업 리그테이블]①힘들었던 2022년 '숫자로 나타났다'(4월6일)
지난해 글로벌 경기침체와 금리 인상 등 어려운 경영 환경이 지속되면서 기업들은 지독한 불황에 시달렸다. 하지만 혹독한 대내외 환경 속에서도 기업들은 미래 준비를 아끼지 않았다. 삼성·SK·현대자동차·LG·한화 등 5개 기업군은 지난해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에 전년보다 많은 자금을 투입했다. 특히 혹한기를 지나고 있는 반도체 기업들의 투자가 두드러졌다.
힘들어도 '175조' 쏟았다
비즈워치가 삼성·SK·현대자동차·LG·한화 등 5개 기업군의 주요 비금융 상장사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이들은 지난해 설비투자·연구개발비용으로 총 175조원을 쏟았다. 전년 141조원과 비교해 24.4% 늘어난 수준이다.
이는 전년 대비 모든 기업군의 투자가 늘어난 덕이다. 특히 SK(㈜SK·SK하이닉스·SK이노베이션·SK텔레콤·SK가스·SK케미칼·SKC·SK스퀘어·SK네트웍스·SK아이이테크놀로지·SK바이오팜 등 11개사, 상장사 중 설비투자·연구개발 비용을 공시한 기업 기준)의 전년 대비 투자 증가율이 55.1%로 가장 많이 늘었다.
가장 투자를 많이 한 그룹은 삼성이다. 삼성(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SDI·삼성전기·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SDS·삼성엔지니어링·에스원·삼성중공업 등 9개사)은 작년 총 87조2140억원을 투자했다. 조사대상 5개 그룹 투자금의 절반인 49.8%에 달한다.
삼성그룹 내 투자 비중은 삼성전자가 약 90%를 차지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설비투자에 53조1153억원, 연구개발에 24조9192억원으로 총 78조345억원을 쏟았다. 전년(70조6239억원)과 비교하면 10.5% 늘어난 수준이다. 작년 연간 영업이익이 16% 줄었지만, 미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투자를 늘리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전체 투자 금액 중 반도체 설비 신·증설, 보완에만 전년 대비 9.9% 늘어난 47조8717억원을 투입했다. 메모리의 경우 평택 3·4기 인프라와 EUV(극자외선) 등 첨단 기술 적용 확대, 차세대 연구 개발 인프라 확보를 위한 투자가 중심이 됐다. 파운드리는 평택 첨단 공정 생산 능력 확대와 미국 테일러 공장 인프라 구축에 투자를 집중했다. 이에 비해 디스플레이에는 전년 대비 4.5% 줄어든 2조4958억원이 투입됐다.
삼성전자 다음을 잇는 건 SK하이닉스였다. 수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가 필수적인 반도체 사업의 특수성 때문이다. SK하이닉스의 작년 투자 규모는 24조5553억원이다. 설비투자는 19조6500억원으로 전년 대비 47% 늘었고, 연구개발비용은 21.3% 증가한 4조9053억원을 기록했다. 그룹 내 비중은 절반을 웃도는 65%였다.
현대자동차 역시 투자 규모를 확대하며 현대차그룹 내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했다. 현대자동차의 지난해 총투자 규모는 11조8303억원으로 그룹 전체 투자 규모(19조8593억원)의 59.6%였다. 전년 대비 설비투자는 12.6%, 연구개발비는 7.8% 늘었다.
4위는 LG전자(8조1902억원, LG이노텍 포함)였고, 그 뒤는 △SK이노베이션(7조8964억원) △LG디스플레이(7조6306억원) △LG에너지솔루션(7조1669억원) 순이었다.
반도체 혹한기 였지만…삼성·SK 투자 지속
그룹사별로 보면, 삼성그룹 내에서는 삼성SDI가 삼성전자의 뒤를 이었다. 삼성SDI의 작년 총투자 규모는 3조7052억원으로 전년 대비 21.2% 증가했다. 디스플레이·반도체 소재 사업을 영위하는 전자재료부문의 투자는 전년 대비 20.2% 줄었지만, 배터리 사업을 담당하는 에너지솔루션 사업부의 투자 규모가 21.4% 늘었다.
삼성SDI는 작년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한 만큼, 투자에도 속도를 내는 모양새다. 현재 삼성SDI는 유럽 헝가리 2공장 생산능력(CAPA) 확장을 위한 증설을 진행 중이다. 또 스텔란티스와 합작법인(JV)을 설립해 미국 인디애나주에 전기차 배터리 생산공장을 짓기로 했다. 최근에는 합작공장을 설립을 위해 제너럴모터스(GM)와도 손을 잡았다.
차세대 배터리 기술 개발에 집중하기 위해 연구개발비도 꾸준히 늘리고 있다. 작년 삼성SDI는 연구개발비용으로 역대 최대치인 1조764억원을 투입했다. 전년 대비 22.7% 증가한 수준이다. 최근에는 글로벌 R&D(연구개발) 역량 강화를 위해 중국 상하이에 해외 세번째 연구소를 설립했다.
삼성전기는 지난해 1조3734억원의 설비투자를 진행했다. 특히 MLCC(적층세라믹콘덴서)를 담당하는 컴포넌트 사업부의 증설 투자는 전년 대비 13.7% 줄이고, 반도체 패키지 기판을 맡고 있는 패키지솔루션 사업부 투자 규모는 300%가량 늘렸다. 삼성전기는 지난해부터 사업 다각화를 위해 플립칩볼그레이드어레이(FCBGA) 등 반도체 기판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SK도 삼성과 마찬가지로 반도체와 배터리 투자에 집중했다. SK이노베이션은 작년에 비해 투자 규모를 2배 이상 늘리며 SK하이닉스와의 격차를 좁히고, 기존 2위였던 SK텔레콤을 역전했다. 주력 투자 분야는 배터리다. 자회사인 SK온의 국내·외 설비투자와 신·증설에 7조4786억원을 투입했다. 전년 투자 규모인 2조6904억원에 비하면 2.8배 늘어난 수준이다.
SK온은 6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 중이지만, 당장의 수익성 개선보다 투자에 집중해 경쟁력을 확보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현재 SK온은 헝가리 이반차, 중국 옌청, 미국 조지아·켄터키·테네시에 신·증설을 진행 중이다.
SK텔레콤은 전년과 유사한 규모의 투자를 지속했다. 주력사업인 무선통신사업의 용량 증설 및 품질향상, 서비스 개선을 위해 2조2150억원의 자금을 투입했다. 또 가입자망 확보, 시스템 향상 차원에서 커버리지 확대와 미디어 플랫폼 고도화에 8202억원을 쏟았다.
디스플레이 투자 털어낸 LG
LG그룹에서는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을 합산했을 때 LG전자의 투자 규모가 8조1902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다만 설비투자만 놓고 보면 LG에너지솔루션과 LG디스플레이가 더 많았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이차전지 생산시설 신규, 확장에 6조2909억원을 투자했다. 투자는 국내와 해외 공장을 아울렀다. 지난 6월 LG에너지솔루션은 원통형배터리 라인 증설을 위해 오창 1공장에 1500억원, 2공장에 5800억원을 투입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 미국에서는 GM과의 합작사인 얼티엄셀즈가 1공장 가동에 이어 2, 3공장도 구축 중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현대차와 협력해 합작 배터리 공장도 짓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해 창사 이래 처음으로 2조원대 영업손실을 기록했지만, 투자 규모는 전년 대비 큰 폭으로 늘렸다. 작년 LG디스플레이의 설비투자 규모는 5조2000억원으로 전년(3조2000억원) 대비 2조원 증가했다.
이에 대해 LG디스플레이는 실적 컨퍼런스 콜을 통해 "작년 투자는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수준이었는데, 이는 수주형 프로젝트 중심으로 진행해 투자 일정을 가속화했기 때문"이라며 "올해, 내후년에 발생할 것을 당겨온 것이라서 향후 몇년간 총현금흐름 기준 투자비가 증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LG디스플레이는 올해와 내년에는 생산설비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경상 투자와 수주형 프로젝트에만 설비투자를 진행해 규모는 축소할 계획이다.
신사업 집중하는 현대차·한화
현대차그룹에서는 현대자동차가 11조8303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이는 현대차가 최대주주로 있는 현대로템의 증설·보완투자 금액인 330억원을 포함한 수치다. 기아는 작년 1조3362억원을 설비투자에 사용했다. 국내 공장뿐 아니라 미국·슬로바키아·멕시코·인도공장의 생산능력 증대 및 가동률 향상 등을 위해서다. 이는 전년 대비(1조3955억원)에 비하면 소폭 줄어든 수준이지만, 올해는 두 배에 달하는 2조3599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현대모비스는 작년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에 전년 대비 13.9% 늘어난 2조4203억원을 투입했다. 이는 지난해 2월 내놓은 3년 미래 투자 계획에 따른 것이다. 현대모비스는 지난해 2월 미래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동화 및 핵심부품 증가에 대응해 내부 투자에 3조~4조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나아가 올해 2월에는 '모빌리티 플랫폼 공급자'로의 전환을 꾀하며 향후 3년간 투자 규모를 2조원가량 늘리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화는 한화솔루션의 고순도 크레졸 신규사업에 투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고순도 크레졸은 비타민E와 같은 헬스케어 제품과 합성향료, 플라스틱 첨가제, 전자재료 등 다양한 분야의 기초 재료로 쓰이는 화학 소재다. 한화솔루션은 순도 98% 이상의 고순도까지 불순물을 제거하는 기술을 개발, 올해 상업 생산을 목표로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 고순도 크레졸 제품의 글로벌 톱3 자리를 노린다. 이를 위해 작년에만 한화솔루션 전체 투자의 40% 수준인 1157억원을 투자했다.
한화솔루션 큐셀부문은 태양광 사업 투자에 한창이다. 충북 진천공장에 '탑콘(TOPCon)' 셀 파일럿 라인 가동을 위해 지난해 622억원을 투자했다. 탑콘 셀은 누설 전류를 줄여 기존 퍼크(PERC) 셀 대비 발전 효율을 2~3% 높인 제품이다. 또 연간 1.5GW(기가와트시)의 탑콘 셀을 양산하는 것을 목표로 라인 증설에 361억원을 투입했다.
베트남에 항공기 엔진부품 공장을 둔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엔진 제조설비 증설에 1108억원을 쏟았다. 특히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항공엔진, 방산사업 등을 영위하는 만큼 전체 투자 중 연구개발 비중이 높았다. 작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연구개발 규모는 5867억원으로 전체 매출액의 9% 수준에 달했다.
백유진 (byj@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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