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의 내로남불? ‘스파이웨어 금지’라더니 동맹 도청엔 “…”
또 불거진 도청의혹에 침묵
미국 정보기관이 동맹국들을 여전히 감청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 8일(현지시각)에서 불과 9일 전인 지난달 30일, 미국은 영국·프랑스·캐나다 등 10개국과 함께 ‘상업용 스파이웨어의 확산과 남용에 대응하는 노력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등은 이 공동성명에서 문자메시지나 휴대폰 정보를 빼돌리는 스파이웨어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위협”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수단이라며 사용 금지를 결의했다.
이 성명을 주도한 것은 다름 아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120여개국이 참여한 제2차 ‘민주주의 정상회의’ 직전인 지난달 27일 “미국의 지도력을 보여주겠다”며 미 연방정부에서 스파이웨어 사용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어 이 문제를 이틀 뒤 개막한 정상회의의 중심 주제로 삼았다. 백악관 고위 당국자는 바이든 대통령은 “기술은 민주 사회에 반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이바지하기 위해 쓰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회의를 준비하는 기간에도 미 정보기관이 한국 등 동맹국 정부를 불법 감청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내세우는 바이든 행정부 역시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미국은 그동안 미국과 동맹국의 민감한 정보가 중국공산당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 있다며 중국 화웨이의 통신장비를 퇴출하고, 중국 기업이 소유한 동영상 공유 플랫폼 ‘틱톡’의 사용을 막기 위해 노력해 왔다. 같은 기술도 권위주의 정부가 사용하면 훨씬 위험하다는 논리를 내세우지만 미국만을 위한 표리부동한 주장이었던 셈이다. 더구나 미국은 2013년 10월 감청 전문기관인 국가안보국(NS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의 무차별적인 감청 행태를 폭로한 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나서 동맹국 정부를 감청하지 않겠다고 거듭 약속한 바 있다.
당시 10년 이상 휴대폰을 감청당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등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완전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에 대해 거세게 항의했다.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의 직접 설득에도 불구하고 “방문할 조건이 못 된다”며 그해 10월 예정됐던 미국 국빈 방문을 취소하기까지 했다.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도 감청당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 등에게 사과하고 이듬해인 2014년 1월엔 동맹국 지도자들을 감청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서약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감청 논란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 약속이 나온 이듬해인 2015년 미국이 이란과의 핵 협상에 반대하는 이스라엘의 동향 파악을 위해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등을 감청했다고 보도했다. 덴마크 공영방송은 2021년 국가안보국이 2012~2014년 덴마크 정보기관과 협력해 독일·프랑스·스웨덴·노르웨이 고위 정치인과 관료들의 통화 내용과 문자메시지 등을 감청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메르켈 총리도 역시 피해자로 거론됐다. 오바마 대통령의 약속 뒤로도 감청이 이어졌다는 얘기다. 메르켈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또다시 “동맹국들 사이에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동맹은 감청하지 않겠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약속이 ‘빈말’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번 사건으로 미국에 대한 신뢰는 땅으로 떨어졌지만, 백악관은 아직 공개적인 유감 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 또 불법적인 감청의 재발을 막기보다 유출자를 색출해 내고, ‘이 모든 게 서방의 분열을 노리는 러시아의 음모’라는 입장을 전하는데 골몰하는 모습이다. 사브리나 싱 미 국방부 부대변인은 이날 “소셜미디어로 유포된 민감하고 중요한 기밀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자료의 유효성에 대한 검토와 평가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관련 부처들이 미국과 동맹, 파트너 국가들의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평가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며 “주말 동안 미국 관리들이 동맹 및 파트너 국가들과 연락했다”는 반응을 보이는데 그쳤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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