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참을 수 없는 '삼성 본색' 언론의 가벼움, 그들이 몰랐던 진실의 무거움
ㆍ 베트남 메탄올 사고에 애꿎은 삼성전자 ‘불똥’…“직접 관련 없는 업체” (조선비즈)
ㆍ 삼성전자 베트남 2차 협력사 납품사기 당했는데…시민단체는 '삼성 탓' (데일리안)
ㆍ 베트남 2차 협력사 '가짜 에탄올' 피해…삼성전자는 무슨 죄일까 (뉴스1)
지난 3월 29일 주요 언론들이 내놓은 기사들의 제목입니다. 제목만 다를 뿐 동일한 내용을 다루는 기사가 20여 건에 이릅니다. 제목만 훑으면 삼성이 애먼 죄를 뒤집어쓴 피해자로 보입니다.
기사 내용은 한결같습니다. △ 삼성은 납품 사기를 당한 피해자다, △ 삼성에게 2차 협력사의 문제까지 책임을 묻는 것은 무리다, △ 삼성은 유해 물질 관리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등 이른바 '업계 관계자'의 말을 빌려 삼성의 입장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사를 꼼꼼히 읽어도 정작 중요한 내용은 알기 힘듭니다. 시민단체들이 어떤 이유로 삼성을 규탄하는지, 베트남에서 발생했다는 사건의 원인은 무엇인지 전후 맥락이 빠져 있습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문제를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삼성은 죄가 없다'라는 해명부터 듣고 있어야 하는 꼴입니다.
이 기사들이 전하지 않은 행간은 뉴스타파의 연속보도 '글로벌 삼성의 위험한 공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언론들이 말하지 않은 사건의 맥락을 마저 채워서 살펴보면 '피해자'라는 삼성의 모습은 딴판으로 달라집니다.
피해자로 둔갑한 책임자
지난 3월 초 베트남 박닌시에 있는 삼성전자 베트남의 한 협력사 공장에서 메탄올 중독 사건이 발생해 노동자 1명이 사망하고 36명이 실명 등의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기사들에서 언급된 시민단체의 기자회견은 베트남 박닌에서 발생한 이 메탄올 중독 사건에 대한 삼성의 책임을 규탄하는 것입니다.
삼성이 납품 사기의 피해자라는 언론의 보도는 마치 이 사건이 어쩌다 발생한 일회적인 사건처럼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뉴스타파의 취재에 따르면, 삼성의 베트남 협력사들이 메탄올과 같이 금지된 유해 물질을 취급하다 적발되는 일은 최근까지도 비일비재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삼성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매년 발행하는 자신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등을 통해 완벽에 가까운 공급망 유해 물질 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꾸며온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어쩌다 삼성이 피해를 입어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사실은 장기간 방치되어온 삼성의 관리 부실이 참사를 낳은 구조적 원인인 셈입니다.
더구나 삼성전자는 이미 2016년 국내 협력사에서 발생한 메탄올 실명 사건으로 인해 사회적 지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금속 가공 공정에서 냉각과 세척 목적으로 메탄올을 사용하다가 제대로 된 보호장구를 갖추지 못한 노동자들이 실명과 같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점은 시간과 공간의 터울을 두고 판박이처럼 같습니다.
삼성에게 2, 3차 협력업체의 관리 책임을 묻는 것은 무리라는 '업계 관계자'의 반문은 7년 전 국내 사건 때도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도 공급망 관리의 최종 책임을 갖고 있는 원청 삼성이 제도적 허점을 악용해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사건이 발생한 베트남 협력사의 경우, 삼성의 1차 협력사의 공장 안에 2차 협력사가 있는 특수한 경우라 언론의 지적은 꼭 들어맞지 않습니다.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확인되는 내용입니다.
7년 전 국내 사건 당시, 삼성은 국내외 협력사들에서 메탄올 등의 유해 물질을 관리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재용 삼성 회장은 국정 농단 국회 청문회장에 나서 이 사안 등에 대해 '막중한 책임을 느낀다'라고 발언하기도 했습니다. 삼성이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등을 통해 해외 협력사 공급망의 유해 물질을 직접 관리하고 책임지고 있다고 스스로 언급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입니다.
앞서 뉴스타파는 취재 과정에서 삼성에 협력사 유해 물질 관리 문제에 대한 질의서를 보낸 바 있습니다. 구체적 사실 관계를 묻는 취재진에게 삼성은 '환경안전 관련 법규와 규정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다'라는 원론적인 답변만을 해왔습니다.
일련의 문제에 답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직접 입장을 밝히는 게 아니라 언론과 '업계 관계자'의 발언을 통해 간접적으로 말을 흘리는 삼성의 의중이 궁금합니다. 독자들이 이번 메탄올 중독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말이 궁해진다는 점을 삼성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존립 기반' 신뢰가 무너지는데, 언론은 아직도 '삼성 본색'
이러한 삼성의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론은 삼성의 일이라면 일단 두둔하며 나서고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이른바 '삼성 피해자 프레임'도 어쩐지 낯설지가 않습니다. 당장 여러 장면이 떠오릅니다.
2015년 오너 일가의 이익을 위해 추진됐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때가 대표적입니다. 막대한 주주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문제의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 삼성은 언론 보도에서 돌연 해외 헤지펀드의 공격을 받는 피해자로 둔갑했습니다. 합병안에 찬성표를 던진 국민연금을 두둔하던 언론도 많았습니다. 수년 뒤 삼성과 권력의 비선이 손을 잡고 국민의 돈인 국민연금 운용자산에 큰 피해를 입힌 불법 행위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보도를 두고 사과한 언론은 아직 없습니다.
2021년 이재용 삼성 회장의 가석방을 앞두고 나온 낯 뜨거운 언론 보도도 생각납니다. 권력 비선과의 거래를 통해 적극적으로 오너 일가의 이익을 취했던 삼성의 오너는 어느새 정치 권력에 겁박당해 헌금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로 둔갑했습니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구원투수 역할을 할 재벌 오너가 반재벌 정서로 인해 부당한 옥살이를 산다는 목소리가 언론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이러한 우리 언론의 모습을 익히 봐온 뉴스타파는 삼성 베트남 공장의 환경안전 문제를 다루는 보도 말미에 이런 말을 보탰습니다.
저희가 오늘 보도를 결정한 또 한 가지 이유는, 한국 언론 최대의 광고주인 삼성을 제대로 감시할 수 있는 것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언론뿐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오늘 보도한 삼성 베트남 공장의 환경 파괴 실상을 어느 언론이 따라서 보도하는지 지켜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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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언론들이 이른바 '반도체 전쟁'의 일선에 있는 삼성전자에 힘을 싣기 위해 어떤 판단을 한 것은 아닐까요? 언론들이 무엇이 진짜 국익인지 헷갈릴 수도 있다는 노파심에 이런 말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누군가는 오늘 저희의 보도 내용에 대해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해외에서 저지른 잘못을 폭로하는 것이 과연 국익에 부합하는 보도인가. 뉴스타파 영상 맨 마지막에 나오는 고 리영희 선생의 말씀처럼 저희는 저널리즘의 본질이 국익이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허위나 은폐에 의지해야 지켜지는 국익이라면 진짜 국익이 아니라 결국 특정한 누군가의 이익이며, 종국에는 국민 모두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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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이 같은 뉴스타파의 조언을 귀담아들은 언론은 없었습니다. 국제 단체 IPEN의 성명과 해외보도가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인용보도에 나선 언론도 없었습니다.
앞서 국내 언론들이 '삼성 본색'의 오명을 떨쳐낼 수 있었던 기회가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깝습니다. 언론과 삼성의 밀월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뉴스타파의 '장충기 문자' 보도가 대표적입니다. 언론의 존재 기반인 독자의 신뢰가 땅에 떨어지는 와중에도 언론은 여전히 교훈을 얻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국내 언론들이 몰랐던 진실의 무거움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글로 운을 뗀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그들이 외면하거나 때론 왜곡한 사건의 진실이 어떤 것인지 일러주고 싶었습니다.
이번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과 그 협력사들의 환경안전 실태를 취재하며 베트남 현지의 많은 시민, 언론인들을 접촉했습니다. 그 중 상당수는 뉴스타파의 취재 요청을 피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치 학습된 것처럼 삼성과 그 협력사 공장이 안전하다는 말을 읊조렸고, 또 어떤 사람은 취재진과 접촉한 사실이 알려졌을 때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이 크다고 손사래쳤습니다. 취재진도 베트남 현지를 취재하는 동안 공안과 삼성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진실에 다가서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들과 다른 태도를 보이는 베트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뉴스타파의 취재 내용을 접하고 침묵과 은폐로 대응하는 삼성, 그리고 그러한 삼성을 또 다른 침묵과 은폐로 대하는 베트남 정부에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느낀 분노를 표출할 창구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언론과 기관에 문제 사실을 알리고 공론화를 촉구했지만 행동에 나서는 곳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문제를 알리려는 시민과 시민단체는 사찰과 경제적 압박을 받았고, 분노하던 이들 중 일부는 태도를 바꿔 침묵의 대열에 몸을 섞었습니다. 불과 40년 전쯤 우리도 겪었던, 민주화 이전의 한국 사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고군분투하는 베트남 현지의 시민, 언론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언젠가 베트남에서도 언로가 열리고, 인권과 환경 문제가 사회적 의제가 되는 날이 오리라 믿고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삼성의 문제를 계속 감시하고, 국제 사회에 연대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취재진에게 전해진 목소리 몇 개를 정리했습니다.
삼성 공장의 문제는 처음 듣는 게 아닙니다. 이전에도 베트남인 내부고발자가 나와 사실을 알린 적 있지만, 정부는 이 사실을 듣고도 침묵했습니다. 당시 문제 제기를 했던 사람은 다시 삼성의 관계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나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베트남의 시민 의식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베트남도 이런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 베트남 현지 시민
베트남 언론이 정부의 검열 때문에 지나쳤던 이야기를 게재해서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베트남 언론인들 사이에서도 뉴스룸(대부분 관영 언론)이 삼성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불만이 커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와 관련해 정말 무엇인가 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기사 링크를 국제 신문에 보내려고 합니다. 내 임무는 최선을 다해 그 사실이 그냥 잊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 베트남 현지 언론인
척박한 환경에서도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의 결연한 자세에 숙연해집니다. 기사를 쓰는 동안에도 베트남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에 미치지 못할까, 무거운 마음이 따라다녔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침묵을 하거나 책임자를 피해자로 포장하는데 일조하는 일부 언론의 행태를 보며 마음이 더욱 불편했습니다. 그들의 기사가 삼성을 돕기는 커녕, 글로벌 기업답게 발전할 기회를 앗아가고 있다는 점도 안타까운 대목입니다.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결국 국내 최대 광고주 삼성의 영향력 아래 언론은 자유롭지 못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너무도 쉽게 누군가의 간절함을 배신하는 언론의 가벼운 행태에, 오래전 쓰인 소설의 제목이 자꾸 생각납니다.
뉴스타파 오대양 ody@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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