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비디오 가게를 박제하다…20여년 수집품 대중에 공개
[짬][짬] 광주 영화운동가 조대영 디렉터
광주광역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 전시중인 ‘원초적 비디오 본색’이 화제다. 1982년부터 출시되어 2006년 단종된 국내 비디오테이프 2만7천여점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는 지난해 11월 개막해 지난 2월까지 끝날 예정이었으나 반응이 좋아 오는 6월18일까지 연장됐다.
20여년간 수집해온 5만여개의 비디오 중에서 정선해 처음 대중에게 공개한 조대영(54·광주 동구 인문학당 프로그램 디렉터)씨는 1990년대부터 광주 지역의 영화운동을 일궈온 영화인이다. 1994년부터 페미니즘영화제, 컬트영화제, 환경영화제 등 다양한 영화제를 직접 개최했고 정성일, 박찬욱, 변영주 등 감독들을 초청해 강좌도 진행했다. 또 2011년 광주에 대형 중고서점이 문을 열자 영화 전문책은 물론 소설, 시, 만화, 미술, 사진, 음악, 성(섹스), 문학계간지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수집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국내뿐 아니라, 독일 프랑스 러시아 판본까지 300여권이나 모았다. 그의 개인 수장고에는 비디오뿐 아니라 여러 분야의 서적과 잡지 5만여권이 쌓여있다.
“제대로 된 공간이 마련되어 우리 영화문화를 풍성하게 하는 공적 자산으로 활용됐으면 좋겠어요.” 지난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어디든 공간을 제공해준다면 기꺼이 수집 자료를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2000년초부터 비디오테이프 수집
폐업하는 대여점 80여곳 찾아다녀
아시아문화전당서 2만7천여점 전시
‘원초적 비디오 본색’ 6월까지 연장
1990년대초부터 지역 영화운동 앞장
“어디든 공간 제공하면 모두 기증”
총 4개 구역으로 나누어 전시한 비디오들을 둘러보면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가정용 비디오 시장의 흐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입구의 인포룸에서는 영화 잡지 <키노> <로드쇼> <스크린> <씨네21>을 비롯한 책자가 모여 있다. 옆에는 광주 지역의 대표적인 비디오 운동인 1980년대 광주 비디오 자료부터 지역의 시네마테크 운동 자료가 마련된 ‘비디오 꼬뮌들의 연대기’가 함께 전시 중이다. 에이(A)구역에는 드라마·액션영화·중국영화를 정돈해놓았고, 비(B)구역에는 한국영화·일본영화·호러영화·서부영화·전쟁영화 등을 모아놓았다. 시(C)구역에서는 만화영화 시리즈와 어린이영화도 볼 수 있다. 특히 전시 초입부 비디오 열람 코너에서는 직접 재생해볼 수도 있다.
전시는 어떻게 열게 되었을까. “대성초교 사거리에 ‘비디오 보물섬’이라는 비디오 가게가 있었다. 2000년 초 비디오가 컨테이너 박스에 실려 산업폐기물로 버려지거나 변두리 모텔로 팔려나가던 시절부터 사비를 털어 비디오를 모아 지하 창고에 저장했다. 몇년 전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SBS) 방송에 비디오 수집가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아시아문화전당의 김지하 학예연구관이 그걸 보고 전시를 한번 해보자고 제안했다.”
전시 준비는 얼마나 걸렸을까. “전시 제안받고 준비하는 데 대략 3년이 걸렸다. 일단 최대한 모으자는 생각으로 일괄 구매해 보관한 거라 이번 기회를 통해 제대로 점검하고 리스트업해 2만7천여장을 선보였다. 평일에도 1천명 이상의 관람객이 꾸준히 방문하고 있다. 관객 반응이 좋아 뿌듯하다.”
맨처음 어떤 마음으로 모으기 시작했는지도 궁금했다. “모아야겠다고 결심한 시점은 비디오 가게들이 줄줄이 폐업하던 시기였다.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봤을 때 비디오는 반드시 기록물로서 가치를 가질 거라고 예상했다. 광주 전남 지역에서 폐업하는 비디오 가게 80여 군데를 돌면서 박스째 비디오를 가져와 보관하기 시작했다. 중복되는 걸 정리하면서 모으다 보니 어느새 5만장이 넘었다.”
비오가 산업적 효용이 다하고 사라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모으기 시작한 이유는 뭘까?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100년쯤 지나면 가치가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했을 때는 충격을 받았다. 방향이 틀리지는 않은데, 시간은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힘이 빠졌다. 하지만 설사 내 살아 생전 빛을 보지 못해도 상관없다. 필요한 일이고, 언젠가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닐 거다. 세월을 새기는 작업이라고 해야 할까. 아카이빙을 한다는 건 그런 일이다.”
비디오만의 매력이 있다면? “비디오테이프 한 장에 한 편의 영화가 온전히 담겨 있다는 점이다. 요즘의 디지컬 저장 매체처럼 엄청 많은 용량을 담아낼 순 없다. 그 점이 매력이다. 영화라는 물성 자체가 손에 잡히는 형태로 눈 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분 좋은가.”
영화운동에 나선 계기는 무엇일까. “방위병 시절이던 1991년 퇴근 뒤 영화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연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강좌, 워크숍 등을 꾸준히 하다 보니 영화제까지 열게 됐다. 동아리 ‘굿펠라스’를 꾸려 영화 토론 모임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인문학 강좌를 열고 책도 내고 있다. 생활에 대한 고민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나를 성장시키고 내 영혼을 성숙하게 만들어준 것이 영화다. 그리고 나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배워온, 천생 영화인이다.”
전시 이후 계획도 궁금했다. “당장은 비디오를 어떻게 보관할지 결정해야 한다. 제대로 보관하고 소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장기적 관점에서 아카이빙에 대한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 언젠가 영화사에 이렇게 좋은 고전영화가 많았다는 걸 알리는 데 기여하고 싶다.”
송경원 <씨네21> 기자 enki@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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