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롯 구사한 수필은 이렇게 다르다
[머니투데이 더리더 백우진 글쟁이(주) 대표] [리더의 글쓰기 원포인트 레슨] ‘원재료’ 재구성하는 플롯 기법, 산문의 흡인력 강화
[편집자주] 많은 리더가 말하기도 어렵지만, 글쓰기는 더 어렵다고 호소한다. 고난도 소통 수단인 글을 어떻게 써야 할까? 리더가 글을 통해 대외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노하우를 구체적인 지침과 적절한 사례로 공유한다. <백우진의 글쓰기 도구상자>와 <일하는 문장들> 등 글쓰기 책을 쓴 백우진 글쟁이주식회사 대표가 연재한다. <편집자주>
#1. 동화책을 처음 읽은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다.
#2. 소년 시절의 나는 집에서 광화문 교보까지 자주 걸어다녔다. (중략) 그래도 차비를 아껴서 모으면 시집을 사서 모을 수 있었다.
#3. 중학교 올라가기 전 어느 겨울날, 대학생인 막냇삼촌이 우리 집에 왔다. (중략) 삼촌은 포니2의 옆자리에 나를 태우고 시내로 향했다.
#4. 그때가 아마 스물넷 즈음이었고, 이제껏 살면서 가장 처절했던 시절이었다. (중략) 나는 곰팡이처럼 방 안에 콕 박혀 독하게 퍼져갔고, 그때 어느 책을 우연히 읽기 시작했다.
#5. 위인전이 물리기 시작했다.
이들 인트로(도입부)는 산문집 〈우리 사이의 순간들〉에서 인용됐다. 이 산문집은 교보문고 광화문점이 2022년 개점 42주년을 맞아 기획했다. 필자는 소설가, 시인, 수필가 등 27인이다. 인용된 인트로는 모두 책과 얽힌 추억을 들려준다. 인트로 다섯 건이 모두 동일한 유형에 속한다고 여겨지는지? 다시 읽어보자. 5번 ‘위인전이 물리기 시작했다’는 산문은 이야기를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작가는 ‘부모님이 언제 위인전을 사 주셨는데, 어느 정도 읽은 상황에서 어떤 계기가 발생했다’는, 그 앞 단계를 생략했다.
이 산문 중 생략된 이야기의 발단은 이 인트로에 이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위인전은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이 큰맘 먹고 할부로 구입한 수십 권 시리즈였다. 작가는 몇 달간 위인전을 듬성듬성 읽었다. 그러고선 결론을 내렸다. 자신은 결코 위인이 될 수 없을 것이고, 위인처럼 고단하게 살고 싶지도 않다고. 작가는 곧 다른 책을 만날 수 있었다. 동네에 막 생긴 도서대여점의 만화책이었다. 위인전이 물린 작가가 다른 작가들처럼 썼다면 글은 다음과 같이 전개됐으리라.
플롯 짜기는 이야기 원재료를 재구성하기이다. 원재료는 시간 순서로 감춤 없이 펼쳐진다. 이를테면 누가 언제 어디서 왜 무엇을 어떻게 했는데, 다음 날 다른 일이 벌어졌고, 다른 사람은 그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고 등등을 다 담아낸다.
기법: 플래시백, 건너뛰기, 지연 등 다양
원재료를 재구성하는 기법으로는 특정한 장면이나 사실, 사건을 인트로로 던진 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플래시백이 있다. 다섯째 산문이 이 기법을 구사했다. 다른 기법으로는 사건의 일부를 건너뛰기가 있다. 이야기의 전모를 들려주는 대신 등장인물 각각의 관점에서 부분 부분 서술하는 유형도 있다.
독자의 흥미를 더 돋우기 위해 뜸을 들이는 지연의 플롯도 있다. 또는 이야기의 쐐기돌(아치의 정점에 있는 돌)을 설명 없이 서두에 배치하는 플롯도 있다. 독자는 그 쐐기돌이 전개되는 이야기와 어떻게 맞추어지는지 물음표를 곤두세운 가운데 글을 읽게 된다.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이 바로 거슬러 올라가기 기법으로 쓰였다. 이 단편소설의 첫 문단은 “오늘도 우리 수탉이 막 쪼이었다”로 시작한다. 이어 덩치 작은 ‘우리 수탉’을 쪼는 놈이 오소리같이 실팍한 점순네 수탉이고, 이 일방적인 싸움은 점순이가 나를 약올리려고 붙여놓았으리라고 짐작한다.
점순이가 나를 향해 심술을 부리는 이유는 ‘나흘 전 감자 쪼간만 하더라도 나는 저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은 없다’로 시작하는 문단에서 비로소 서술된다. 점순이가 뒤에서 다가와 새살거리더니 내게 군 감자 세 알을 내밀었는데, 나는 퉁명스럽게 밀어버린 것이었다. 쐐기돌 사례. 플롯 짜기의 거장 켄 폴릿은 중세를 무대로 한 대하소설 〈대지의 기둥〉 서두에서 다음과 같은 역사 사실을 보여준다.
플롯 짜기는 역사 서술에도 활용 가능하다. 개인사나 기업의 역사, 나라의 역사를 서술할 때에도 사건의 흐름을 재구성할 수 있다. 하이라이트를 앞세우는 기법도 쓸 수 있고, 갈림길에서 시작하는 기법도 가능하다. 일례로 〈유럽지명사전〉의 아테네 편 중 역사를 소개한 다음 글을 든다. 내가 쓴 이 글은 아테네가 서구 문명에 기여한 바와 전성기를 앞세웠다.
그 다음에는 시간 순으로, 즉 신화 속 아테네에서 시작해 유적으로 확인되는 아테네의 기원 등을 전개했다. (괄호 속 단어나 문구는 인용하면서 추가했다.) 신화 속 아테네에서 시작한 뒤 아테네 도시국가의 기원 등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한 글은 십중팔구 단조로울 것이다.
지금까지 플롯을 주로 인트로 사례로 설명했다. 이로부터 플롯과 인트로의 관계가 나온다. ‘인트로는 잘 짜여진 플롯의 정점에 놓인다’는 것이다. 작가 방현석은 책 〈이야기를 완성하는 서사패턴 959〉에서 “첫 문장, 첫 장면은 시작이 아니라 전체를 함축하고 규정한다”고 설명했다. 이 설명보다는 위의 관계가 더 적절하다고 본다.
서사 기법 중 플롯 짜기를 모른다면 독자를 흥미롭게 할 기회를 아예 활용하지 못한다. 플롯 짜기는 소설 같은 문예적인 장르에만 활용되지 않는다. 당신의 이야기를 담는 수필 또한 플롯을 구사하기 적합한 장르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백우진 글쟁이(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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