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굴 시대”… 일본에 남은 가야 보물, 이대로 끝일까 [일본 속 우리문화재]
일제강점기 참상 수준의 도굴, 오구라컬렉션 형성과 관련
“일본의 해외 문화재 사랑 증거”…문화재 약탈 반성은 없어
그러나 우리에게 이 컬렉션은 감탄의 대상인 동시에 아픔의 흔적이다. 일제강점기 불법적 문화재 유통의 산물이고,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해외 소재 우리 문화재의 대표격이라서다.
“그 참혹함이 조선 전체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도굴 실태는 일본인 학자가 보기에도 참담한 것이었다. 한국사 전공자로 경성제대 교수를 지낸 이마니시 류는 1920년 3월 작성한 보고서에서 이런 내용을 남겼다.
“(경북) 선산군에는…군집한 고분이 도굴되고 파괴되고 황폐화된 참상은 차마 눈으로 볼 수 없고, 실로 잔인하고 모질기 그지없어 심히 공포스럽다.”
도굴은 일제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뒤 일본에서 건너온 무뢰한들로부터 시작됐고, 부장품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불량 조선인들’에게로 퍼져갔다. 1922∼1925년은 ‘대난굴(大亂堀)의 시대’로 불린다.
오구라컬렉션의 형성은 이런 상황과 관련이 있다. 도굴은 그것을 사는 수집가가 있어 만연했다. 전기사업 성공으로 당대 한반도 최고의 부자로 꼽혔던 오구라컬렉션의 주인공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최대 수집가였다.
오구라의 수집품이 전부 도굴품은 아니고, 도굴을 직접 사주하거나 지시한 건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우선 도굴을 유인하고 이를 사주한 자를 엄벌해야 할 것”, “도굴품과 같은 것은 절대로 구입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데 주목해야 한다.
일제가 제정한 ‘고적 및 유물보존규칙’이 도굴 뿐만 아니라 허가를 받은 발굴을 통해 확보한 유물도 일본으로의 유출을 금지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오구라컬렉션은 도의적으로 뿐만 아니라 일제 스스로 정한 규칙에도 어긋났다.
도쿄박물관의 금동관모 등 7점이 출토된 창녕은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사적)아더, 창녕 지역은 삼국사기에서 비사벌로 소개된 곳으로 이 지역 고분군은 5~6세기 가야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창녕 고분군의 상황은 “200기가 넘는 다수가 몇 기도 남지 않고 대부분 도굴되었다”, “거의 전부 도굴되어 내부의 유물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는 등의 공문서로 충분히 짐작되는 바다.
이렇게 파헤쳐진 고분에 나온 유물은 막대했다. 경주 금관총 등 다수의 한반도 고적조사에 관여했던 우메하라 스에지는 “창녕 교동 고분 약 100기의 출토품은 ‘마차 20대, 기차 2량’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이 중의 일부가 오구라에게 흘러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우메하라는 창녕 고분군에서 도굴된 “부장품은 산일(散逸·흩어져 일부가 빠짐)하여 대구의 이치다 지로, 오구라 다케노스케 외의 사람들의 소장으로 돌아가, 그 중에는 아국(일본)의 국보와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된 귀중품도 있다”고 적었다.
오구라에게 들어간 도굴품이 창녕 고분군 유물만은 아니다. 당시 도굴꾼 사이에선 오구라가 후하게 값을 쳐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령지역 고분 300여기를 도굴한 김영조는 유물 전부를 오구라에게 가져다 팔았는데 개당 2원씩 받고 넘겼다는 곡옥만 해도 족히 두 되 이상은 되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 당시 한국 측은 오구라컬렉션이 개인 소장품이긴 하지만 대부분 도굴품이고 가치와 중요성이 탁월하다는 이유로 반드시 환수해야 할 대상으로 꼽았다. 하지만 일본 측은 “개인 소장품은 감독하지 못하고 있다”며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었다. 결국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1432점의 문화재가 돌아올 때 오구라컬렉션은 포함되지 않았다. 반환된 문화재도 약탈을 인정한 것이라기 보다는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양국 간의 문화협력 증진에 기여하기 위한 일종의 성의라고 강변했다. 1432점의 귀국이 ‘반환’이 아닌 ‘양도’로 표현된 이유다.
오구라컬렉션 반환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력분쟁 시 점령지역에서 유출된 문화재의 일본 수입을 막는 법안을 논의한 2007년 4월 6일 일본 중의원 회의에서 당시 공산당 이시이 이쿠코 의원과 이부키 분메이 문부과학상, 정부측 참고인들 사이에 오간 질의응답에서 이런 입장이 잘 드러난다. 이시이 의원은 창녕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모, 새날개모양관식, 굵은고리귀걸이를 사례로 제시하며 질의를 이어갔다.
이시이: 이것(금동관모 등)이 어느 지역에서 온 것인지 아는가.
이부키: 현재 대한민국 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오구라씨라는 분이 구입해 국립박물관에 기부한 것이다.
이시아: 일한조약으로 도자기 등이 한국 측에 양도되었지만 오구라컬렉션은 사적인 것이라는 이유로 반환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대로 끝인가.
정부측 참고인: 일본에 있는 한국 유래의 문화재를 한국에 반환할 의무는 없다는 기본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부키: 한국 혹는 한반도에서 유래한 문화재가 어떤 형태로 일본에 온 것인가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상거래를 통한 것도 있고 아니면 일본으로선 한국에 대해 속죄의식을 가져야 하는 형태로 일본에 온 것도 있을 지 모른다. 다만 법률상으로는 국제법상의 결판이 난 문제다.
정부 측 인사들은 오구라컬렉션이 정상적인 거래의 산물이란 점을 은연 중 강조하며, 한국 문화재 반환 문제는 한일협정으로 끝났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도쿄박물관은 오구라컬렉션을 일본의 해외 문화 수용에 대한 적극성, 개방성의 징표로 소개하고 있다. 소장 중인 해외 문화재 중 가치가 뛰어난 것 100개를 꼽아 정리한 ‘동양미술 100선’이란 책에서 도쿄박물관 소장 동양미술 컬렉션의 특징을 “개인 컬렉션에 유래된 기증품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소개하며 그 중 하나로 오구라컬렉션을 꼽았다. 동양미술 컬렉션을 두고 “일본은 해외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체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며 “해외에서 만들어진 문화재를 사랑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일본인이 얼마나 외국 문화에 관심을 기울여 왔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오구라컬렉션에 깃든 제국주의 시대의 폭력, 피식민 지역의 아픔에 대한 관심은 보이지 않는다.
도쿄=강구열 특파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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