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사람 다 샀나" 꽁꽁 얼어붙은 가전업계, 매장에서 코딩 수업하고 음악회 여는 이유
가전제품 교체 주기도 길어 언제 회복될지 걱정
"신혼부부들도 와서 사가요. 신제품 가격 대비 절반 수준이잖아요."
중고 가전 전문 판매점 직원
9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중고 가전 전문 판매점. 이곳에는 삼성전자, LG전자 등 주요 가전업체들의 에어컨, TV, 냉장고부터 사무용 가구까지 진열돼 있었다. 3층짜리 단독 건물을 사용하는 이 매장은 최근까지 롯데하이마트 영등포구청역점이 있던 자리다. 롯데하이마트는 2019년 2월 새 건물을 지어 이 매장을 차렸는데 4년 만에 문을 닫았다. 길 건너 맞은편에 있던 위니아딤채 당산점도 최근 가게를 내놨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가전 시장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시기 역대 최대 호황을 누렸던 가전업계가 경기 침체 영향으로 수요가 눈에 띄게 줄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형 가전이나 TV의 경우 교체 주기가 10년 정도로 긴 만큼 '살 사람은 다 샀다'는 위기까지 나온다. 가전업계는 발길을 끊은 고객을 다시 불러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가전 사업 4분기 실적 급락…"MZ세대, 결혼 안 하고 TV 안 보는 게 더 큰 걱정"
9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2월 가전제품 판매 금액은 2조6,227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12.5% 줄었다.
기업들의 실적도 고꾸라졌다. 지난해 4분기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VD) 및 가전사업부는 영업손실 600억 원으로 2015년 1분기 이후 7년 만에 적자 전환했다. LG전자의 경우 생활가전을 담당하는 홈어플라이언스앤에어솔루션(H&A) 사업본부의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은 236억 원으로 전년 대비 85% 급감했다. TV를 담당하는 홈엔터테인먼트(HE) 사업본부는 영업손실 1,075억 원으로 3분기 연속 적자를 냈다.
올해 1분기의 경우 두 회사가 사업부별 실적을 알리지 않았지만 증권업계에선 삼성전자 생활가전 사업이 여전히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전망한다. LG전자는 그나마 선방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이 역시 수요 증가보다는 원자재 및 물류비용 정상화에 따른 수익성 개선 효과가 큰 것으로 전해진다.
위니아도 지난해 영업손실 736억 원을 기록해 2018년 이후 4년 만에 적자 전환했으며, 롯데하이마트는 지난해 영업손실 520억 원으로 창사 이래 첫 적자를 냈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 변하고 있다는 점. 업계에선 가전 판매의 주 타깃인 신혼부부의 수가 꾸준히 줄고 저출산까지 이어지면서 대형 가전에 대한 수요도 줄어들 수 있다는 우울한 전망이 나온다. 또 미래의 주요 소비층인 Z세대(1990년 중반 이후 출생)의 경우 TV보다 스마트폰, 태블릿에 훨씬 익숙하다.
매장을 지역 커뮤니티로 만들고, 신사업 개척 나서고
가전업체들이 환골탈태에 나선 배경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23년 동안 사용한 오프라인 매장 명칭 '삼성 디지털프라자'를 '삼성스토어'로 바꿨다. 단순히 삼성전자 제품을 판매하는 양판점의 이미지를 벗어나 지역 커뮤니티의 거점으로 변신을 꾀해 고객을 끌어들인다는 계획이다. 유아와 초등학생 대상 과학·코딩 클래스인 '삼성스토어 코딩스쿨'을 열고 쿠킹·인테리어·쇼트폼 제작 클래스 등 Z세대가 좋아하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삼성스토어에서 운영한다는 방침이다.
LG전자 역시 베스트샵에서 시니어 대상 디지털 기기 강좌, 아이와 함께하는 음악회 등을 진행한다. LG전자 베스트샵 서울 중랑점의 경우 커뮤니티 공간이 필요한 지역 고객들을 위해 '무료 공간 대여 서비스'도 시작했다. 누구나 예약만 하면 무료로 매장 내 공간을 사랑방처럼 활용할 수 있다.
매장 대형화, 점포 구조조정도 진행 중이다. 롯데하이마트는 비효율 점포를 중심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해 2021~2022년 사이 점포 수를 57개나 줄였다. LG전자도 지난해 32개의 매장 문을 닫았다.
시장 개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LG전자는 최근 주주총회에서 '화장품 판매업'을 회사 사업 목적에 포함시켰다. LG전자가 기존에 내놓은 뷰티·의료기기인 프라엘에 사용 가능한 화장품을 판매한다는 계획으로 해석된다. 김치냉장고, 에어컨 사업 중심의 위니아는 2월 척추 건강 의료기기 '위니아me 닥터마사지'를 내놓았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연구 조직인 삼성리서치 안에 차세대 가전 연구팀을 새로 뒀다. 이곳에서는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혁신 제품 개발에 집중할 것으로 전망된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가전제품들이 스마트폰처럼 2, 3년마다 바꾸는 제품이 아니다 보니 코로나19때 있었던 집콕 수요가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몰라 걱정이 많다"며 "실적도 좋지 않은 만큼 대대적인 마케팅보다는 고객의 눈길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로잡을 수 있을지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하늘 기자 ahn70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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