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여행] 강화 섬 걷기 여행

글 강은주·사진 신규철 2023. 4. 10.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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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글 강은주·사진 신규철)

도심을 벗어나 한 시간 반만 달리면 섬에 닿는다. 훗훗한 해풍과 잔잔한 바다가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곳, 인천 강화군의 두 섬 강화도와 교동도를 어슬렁거렸다.

강화 특산물인 소창은 23수의 가는 실을 평직으로 짜서 만든다. 23수는 솜 1그램을 23미터 길이로 뽑아낸 실이다. ⓒKTX매거진 신규철

강화는 섬이다. 이 로맨틱한 지형학적 사실이 우리를 강화로 불러들인다. 고려산에 진달래 피어나고 들녘에 순무꽃 차오르는 계절이면 강화대교를 달려 염하를 건너야 한다. 옛 강화교부터 초지대교까지, 섬과 뭍을 잇는 강화의 다리들을 헤아리자니 문득 궁금해진다. 오직 뱃길뿐이었을 50여 년 전 강화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시절 섬사람의 생활은 또한 어떠했을까.

1970년대까지 강화를 먹여 살린 건 직물 산업이다. 한때 강화에는 약 130개의 직물 공장이 자리했다. 그중 가장 유서 깊고 이름 높은 곳이 바로 조양방직이다. 1933년 순수 한국 자본으로 설립한 최초의 직물 공장인 이곳은 오늘날 인더스트리얼 카페로 부활해 과거 못지않은 명성을 누리고 있다. 그러니까 조양방직이 여전히 기계음으로 요란하던 시대, 강화 여인들은 쉴 틈 없이 날실과 씨실을 교차해 직물을 제조했다. 만든 물건은 도붓장수와 한 조를 이루어 바로바로 내다 팔았다. 온몸에 봇짐을 이고 진 채 도시로 나가 판로를 개척했는데, 1969년 12월 옛 강화교가 완공되기 전까지 이동 수단은 당연히 배였다. 섬으로 뭍으로 드나드는 것도 고된 데다 물때까지 맞추는 게 여간 지난한 일이 아니었다.

과거 염색 공장이었던 평화직물 터를 강화군에서 매입해 소창체험관으로 꾸몄다. 지역의 직물 산업 역사에 관한 전시를 마련한 것은 물론이고 소창 손수건 만들기, 고려 복식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KTX매거진 신규철

소창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강화 특산물이다. 소창이란 목화솜으로 실을 만들어 평직으로 짠 천을 뜻한다. 강화에선 23수의 가는 실로 소창을 만든다. 23수는 솜 1그램을 23미터 길이로 뽑아낸 실을 이르는 표현이니, 숫자가 커질수록 실의 굵기는 가늘어진다. 강화의 직물 산업과 소창의 역사를 아우르는 곳, 소창체험관을 이번 걷기 여행의 시작점으로 삼는다. 과거 염색 공장이었던 평화직물 터를 새활용한 시설이니만큼 역사적 명분도 충분하다.

날실과 씨실을 좇아서, 강화도 직물 역사 산책

목화 조형물로 장식한 담벼락 너머로 비죽 솟아오른 나무 전봇대가 낯선 객을 맞이한다. 대문과 마주 선 소창전시관에서는 원사를 풀어 표백하고, 풀 먹이고, 건조하고, 다시 풀고, 나름질하고, 실패에 감고, 직조하고, 옷감을 완성하는 모든 과정을 정교한 미니어처로 전시하고 있다. 그곳에서 소창뿐 아니라 인견을 생산했던 내력도 엿본다. 인견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법한 지명은 경북 영주 풍기읍이지만, 풍기보다 수십 년 앞서 인견을 생산했던 곳이 강화다. 과거 평화직물과 이화직물에서 제조한 원단을 전시 공간 벽 한편에 죽 널어놓았는데, 그 색색의 빛깔이 물감을 풀어 놓은 팔레트처럼 알록달록하고 형형해서 자꾸 시선이 머문다.

소박한 정원을 가로질러 소창기념품전시관으로 가면 옛 직물 공예품을 모아 둔 조촐한 전시 공간과 함께 고려 복식을 입어 볼 수 있는 대여 공간을 만난다. 이미 한 무리의 가족이 곱게 의복을 차리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 따뜻한 장면을 뒤로하고 마지막 코스인 소창 손수건 만들기 체험을 하러 간다. 하얗고 보드라운 소창을 받아 들고 탁자에 평평하게 깐 뒤 순무, 인삼, 고구마, 새우, 섬쌀 등 강화 특산물을 새긴 도장을 찍는다. 순무김치와 인삼막걸리에 대한 진심을 실어 순무와 인삼 도장 두 개를 든 채 하트 모양으로 꾹꾹 눌러 본다. 이곳에서 보낸 짧지만 농밀한 시간도 지그시 눌러 담는다.

강화 원도심에는 직물 산업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 여럿이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갖춘 소창체험관을 중심으로 올봄 개장 예정인 동광직물과 구세의원을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KTX매거진 신규철

한 걸음 한 걸음, 소창체험관에서 동광직물까지

2023년 현재 강화에 남은 직물 제조업체는 일곱 곳 남짓이다. 기저귀 천으로 쓰던 소창은 1970년대 후반부터 일회용품의 등장으로 수요와 공급이 급감했고, 나일론 같은 합성섬유가 인견을 대체한 동시에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이곳의 직물 산업은 보다 빠르게 쇠락의 길을 걸었다.

소창의 영화로운 시절을 기록하기 위해 강화는 또 다른 공간 두 곳을 새로이 단장하고 있다. 1960년대 말까지 운영하던 강화의 대표 의료기관인 구세의원 건물에 직물 제품 판매 및 전시장을 들이고, 종업원 200여 명을 거느리던 대형 직물 기업 동광직물을 생활문화센터로 개조해 올봄 중 개장을 앞둔 것이다. 생활문화센터라곤 하지만 옛 건물의 흔적과 기물을 고스란히 보존한 전시실과 포토 존을 꾸며 여행자의 발길도 끌어당긴다. 소창 제조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실제 사용했던 기계를 제조 순서에 맞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둘러놓았는데, 그 위로 흰 소창과 실 여러 가닥이 조형적으로 드리워 있어 언뜻 하나의 설치미술 작품처럼 느껴진다. 과거를 되새기며 현재와 공명하는 근사한 풍경이다.

대룡시장은 교동도 여행의 관문이다. 황해도 연백군(현재 연안군) 주민들이 연백장을 재현한 것으로, ⓒKTX매거진 신규철

다시 강화대로에 올라 이강교차로까지 달린다. 거기서 그대로 직진하면 인화로에 접어든다. 우리는 48번 국도의 시작점에 다다라 또 한 번 다리를 건넌다. 목적지는 교동도다.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황해남도 연안군과 마주한 접경지대라, 교동대교로 진입하려면 간단한 출입증을 작성해야 한다. 이 수고로운 절차가 교동도를 아득한 미지의 섬처럼 느끼게 한다.

섬 건너 섬으로, 대룡시장에서 화개정원까지

교동도 산책의 첫 번째 즐거움은 대룡시장에 있다. 6·25전쟁 때 이곳으로 잠시 피란 왔다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한 황해도 연백군(현재 연안군) 주민들이 그들의 생활 터전이었던 연백장을 재현한 게 지금 모습에 이른다. 복닥복닥한 시장 골목에 들어서자 채도 높은 물건들이 저마다 시선을 잡아 끈다. 꽃분홍색 순무와 순무섞박지는 물론이고 '교동산(産)'이라 적어 둔 팻말 옆에 향긋한 봄나물이 줄지어 놓여 있어 자꾸 걸음이 더뎌진다. 그런가 하면 시장 곳곳엔 말뚝박기하는 아이들이나 뻥튀기 기계 돌아가는 장면처럼 1960~1970년대 마을 풍경을 그린 벽화가 자리해 나이 지긋한 이에게는 향수를, 청년들에게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시장 구경이 끝나 갈 즈음엔 노천 다방에 앉아 옛날식으로 초란 노른자를 동동 띄운 쌍화차 한 잔을 들이켜 본다.

교동도의 새로운 이정표 화개정원이 올 5월 정식 개장을 앞두고 있다. 모노레일을 타고 화개산을 오른 뒤, 스카이워크 전망대에서 탁 트인 서해를 조망하는 즐거움을 두루 누린다. ⓒKTX매거진 신규철

허기를 달래고 숨도 돌렸으니 산을 오를 차례다. 섬 중심에 자리한 해발 259미터 화개산이 이 여정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오는 5월이면 21만여 제곱미터(약 6만 4000평) 부지에 테마 정원과 스카이워크 전망대, 모노레일을 한데 모아 놓은 복합 체험 공간 화개정원이 정식 개장할 예정이다.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기 전인데도 이미 발 빠른 여행자들은 임시 개원 중인 이곳을 찾아 저마다의 방식으로 봄볕을 즐기고 있다.

정교하게 매만진 다섯 가지 테마 정원과 탑승 시간이 20여 분에 달하는 모노레일 등 즐길 거리도 많지만 화개산이 발길을 당기는 이유는 이 자리가 왕들의 유배지였다는 역사적 사실, 그리고 저 너머가 바로 북녘이라는 실감이다. 여기 유배된 연산군과 광해군이 보았을 풍경을 상상하다가, 저어새를 형상화했다는 스카이워크 전망대에 올라 새의 눈으로 교동도를 바라보기로 한다. 고구저수지와 봉재산 너머 황해남도 연안군과 배천군이 손에 닿을 듯 아물거린다. 날씨가 맑은 날엔 예성강까지도 보인다고 한다.

호수처럼 잔잔한 서해와 꽃처럼 피어난 섬들을 마주할 때, 그저 섬처럼 서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디 닿은 데 없이 홀가분해지고 싶은 순간마다 강화의 곱고 의연한 섬들을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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