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논란의 승부 조작 사면…도대체 누가 주도했나?

이정찬 기자 2023. 4. 10.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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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자 찾기'보다 중요한 '피해자 바로 알기'

도대체 이 사면안을 누가 주도했을까

지난 열흘 남짓,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안타깝게도 주도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사면권은 회장의 고유 권한이라는 규정(대한축구협회 스포츠공정위원회 규정 제24조)을 근거로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의 무한책임을 묻는 이도 있었고, 협회 행정을 총괄하는 전무이사와 사무총장을 가리키는 이들도 있었다. 경기인 출신 부회장들을 배후로 지목하기도 했다. 정치권에선 국정조사를 통해 주도자를 밝히자는 주장까지 나왔지만,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이번 사면안이 이사회에서 충분한 토론과 찬반 표결조차 없이 의결될 수 있었던 건 의결에 참여한 대다수가 '공감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일관된 우려 표명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 역시 완강한 반대 의사 표출이라고는 보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와 같은 후폭풍을 예상하지 못할 수 있을까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 (사진=연합뉴스)

예상하고도 강행했다면 그 윤리 의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고, 이런 후폭풍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들만의 세상'에 갇혀있다는 방증이다. 정몽규 회장은 결정 사흘 만에 사면안을 전면 철회하며 "2년여 전부터 "10년 이상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이 충분히 반성을 했고, 값을 어느 정도는 치렀으니 이제는 관용을 베푸는 게 어떻겠느냐"는 일선 축구인들의 건의를 계속 받았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비슷한 무렵인 2021년, 프로농구 감독 전원을 비롯한 다수의 농구인 역시 승부 조작에 가담한 지도자를 재심의해달라고 탄원한 바 있다. '이만하면 된 거 아니냐'는 목소리는 종목을 막론하고 경기인들 사이에서 커지고 있다. (다만, 당시 프로농구연맹은 '공정하고 투명해야 할 스포츠 환경 조성'을 위해 재심의 자체를 기각했고, 다시는 이 문제를 논의조차 하지 않기로 아예 못 박았다는 점에서 축구협회와 비교된다.)

그래도 의문은 끊이지 않는다. 도대체 왜, 누구를 위해서

"제가 그때 oo팀에 있었잖아요. 저도 그때 책임을 지려고 사표를 냈었어요." 이번 이사회 의결에 참여한 한 경기인 출신 인사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기자의 표정에 이런 대답을 내놨다. 이 사태의 배경을 조금씩 알게 됐다. '아, 이들은 스스로를 승부 조작의 피해자라고 여기고 있구나.' 일부 동료들의 승부 조작으로 인해, 프로스포츠 산업 근간이 그야말로 뿌리째 흔들렸고, 이 때문에 직업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렸으니 자신들이 본 피해가 만만치 않다는 인식이다. 이어지는 말에서 확신을 갖게 됐다. "XX이는 진짜 착한 선수였어요. 브로커가 어느 날 숙소 앞으로 찾아와 신문지에 싼 돈뭉치를 주고 가면서 승부 조작을 부탁했다는 거예요. 그날 밤, 이건 아니다 싶어서 돌려주려 했다는데 그때부턴 전화를 받나, 그놈들이. 실제로 경기에서는 열심히 뛰었어요." 승부 조작에 가담해 징계를 받은 축구인이 최소 50명에 이른다. 알고도 묵인한 이들이 적지 않고, 몰랐다는 핑계를 대더라도 그 책임이 가볍지 않다.
 

"하루 벌어 하루 산다"

승부 조작에 가담하고, 또 동료 선수들을 끌어들인 게 인정돼 영구 제명 징계를 받은 한 선수는 이번 사면 명단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 뒤 복수의 언론과 인터뷰하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모든 축구 선수의 꿈인 태극마크를 달 정도로 훌륭한 재능을 갖추고도, 한순간에 무너진 인생을 돌아보며 과오에 비해 지나친 피해를 받고 있다고 항변했다. 일부 언론은 앞장서서 가해자를 피해자로 포장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따로 있는데, 엉뚱한 곳에 측은지심을 발휘한 셈이다.
 

승부 조작의 가장 큰 피해자는 팬이다

(사진=연합뉴스)

2011년 전도유망한 골키퍼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때, 최초로 승부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후폭풍은 어마어마했다. 신변을 위협하는 메일로 메일함이 가득 찼다. 취재원들은 물론 일부 동료 언론인조차 '무책임한 보도로 인해 프로축구의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렸다'며 날을 세웠다. 한 웹툰 작가는 '기자 이름 석 자를 잊지 않겠다'는 만화를 그리며 으름장을 놓았고, 요즘 말로 좌표를 찍었다. 팬들은 끝까지 선수들을 믿었다. 그래서 프로축구와 선수, 팀의 명예를 훼손한 기자를 '공공의 적'으로 규정했다. 당시 팬들은 자신의 삶을 부정당한 고통에 분노하고 있었다. 보름 뒤, 승부 조작 혐의로 구속되는 선수가 등장하기 시작하며 실체가 조금씩 드러났고 모든 팬들이 부인,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과정을 거쳤다. 이번 사면 추진은 승부 조작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팬들의 상처를 잊은 결과였다.

작금의 사태는 선수 또는 행정가가 되기에 앞서, 이들이 한 클럽의 열렬한 팬으로서 보낸 시간이 결여된 데서 비롯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용돈을 모아 입장권을 사는 대신, 엘리트 선수로서 초청받아 경기를 보고, 사인 한 장을 위해 몇 시간을 줄 서 기다리고도 외면하고 지나간 선수에게 상처받아 본 경험은 없을 게다. 그저 축구가 좋아서, 혹은 특정 선수가 좋아서 축구가 직업이 된 이들은 지금 팬들이 겪고 있는 처참한 심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정찬 기자jayce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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