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지 끌려가는 길에 고무신을 벗어 던진 이유
제주 4·3사건 제75주년을 맞아 최근 <기나긴 침묵 밖으로>를 펴낸 <한겨레> 허호준 기자의 도움을 받아, 이동현 ㈔제주4·3연구소 연구원과 주요 유적지를 찾았다.
초토화돼 사라진 마을, 곤을동
휘파람새·직박구리가 뒷산 산벚나무 숲에서 우짖었다. 빈 마을터 집담·밭담 안 멀구슬나무 아래 활짝 핀 갯무·자주괴불주머니꽃이며 큰까치꽃이 환했다. 2023년 3월28일 오전 제주공항에서 차로 해안 따라 동쪽으로 20여 분. 샘물이 고여 있어(곤을) 살기 좋았다던 마을, 74년 전 국군에 의해 초토화된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에 다다랐다.
“물론 제주 4·3 때 벌어진 어떤 일도 이해는 안 되지만 그쪽(이승만 정부)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 곤을동 학살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요. 중산간 마을 사람들을 ‘폭도’라고 보는 그쪽 시각대로라도 해안 마을인 곤을동은 ‘보호를 받아야 하는 지역’이거든요. 마을에 무장대 관련 활동한 사람도 아무도 없었어요.”(이동현 제주4.3연구소 연구원)
1947년 3월1일 제주도에서 열린 3·1절 기념대회에서 경찰의 오인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했다. 미군정은 사과 대신 강경 대응을 이어갔다. 1948년 4월3일 ‘5·10 남한 단독선거 반대’ ‘제주도민에 대한 부당한 탄압 반대’를 기치로 남로당 제주도당(무장대)을 중심으로 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이후 들어선 이승만 정부는 같은해 10월17일 ‘해안선으로부터 5㎞ 밖 중산간 지역 통행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고 발표, 무장대 소탕을 강화했다.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공권력에 의한 무분별한 백색테러·집단학살 등으로 인해 당시 제주도민의 10%가 넘는 3만여 명이 희생된 일을 우리말로 ‘제주 4·3사건’, 영어로 레드헌트(Red Hunt·빨갱이 사냥)라고 한다.
1949년 1월4일 오후 3시였다. 국방경비대(현 국군, 이후 토벌대) 제2연대 소속 부대가 ‘해안 마을’ 곤을동을 포위했다. 67가구 중 39가구를 불태웠다. 젊은 주민 10여 명을 앞바다로 끌고 갔다. 변명 한마디 듣지 않고 모두 쏴 죽였다. 이튿날 다시 군인들은 곤을동을 찾았다. 남은 28가구를 마저 불태웠다. 주민 12명을 또 죽였다. 토벌대에 쫓기던 무장대가 곤을동 앞에서 토벌대를 공격한 일이 무차별 학살의 빌미가 됐다고 한다. ‘초가집 굴묵(굴뚝) 연기와 멜(멸치) 후리는 소리 간데없고 억울한 망자의 원혼만 구천을 떠도는구나!’(곤을동 입구 표지석 글귀) 멀리서 트래킹족 두 사람이 올레길(18코스) 따라 별도봉 쪽에서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희생자 명단 공개해 42년 만에 4·3을 세상에 알린, 다랑쉬굴
‘4·3’은 공식적으로 일어난 적 없는 일이었다. 입에 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오랜 금기어였다. 1992년 4월1일 제주시 구좌읍 중산간 지역인 다랑쉬오름 부근 ‘다랑쉬굴’의 존재가 세상에 공개되기 전까지 일이다.
44년 전인 1948년 12월18일 이 굴 속에서 토벌대가 입구에 피운 짚불에 질식사당한 채 장사도 못 지낸 억울한 주민 11명의 백골이, 부인할 수 없는 물증이 쏟아져 나왔다. 이 중 7살 어린이 백골도 있었다. 1948년 가을 토벌대를 피해 피신한 하도리·종달리 주민들이었다.
다랑쉬오름에서 600여m 떨어진 다랑쉬굴은 농사 준비가 한창인 크고 작은 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길 따라 양지꽃·수리딸기꽃 등 봄꽃이 만발했다.
제주4·3연구소 설명을 들어보면 다랑쉬굴의 입구 쪽은 좁지만 안으로 기어 들어가면 ㄷ자형 내부 공간이 나온다. 어둠 속에서 피란민들은 몇 달씩 밥을 지어 먹고 살았다. 발굴 과정에서 가마솥·밥주걱·요강 등이 발견됐다. 토벌대가 밖에서 ‘폭도들은 나와서 투항하라’고 다그쳤다. ‘나가면 죽는다’는 두려움에 피란민은 더 숨어들었다. 토벌대는 수류탄을 터트렸다. 완전히 숨을 끊고자 입구에 불을 질러 연기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 광경을 밖에서 망보던 당시 23살 채정옥씨가 지켜봤다. 토벌이 끝나고 채씨는 눈물로 시신들의 자세를 바로잡고 다시 도주한다. 무장대가 아니었다. 총도 어떤 무기도 없었다. 채정옥씨는 당시 “희생자들은 고통을 참지 못한 듯 돌 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죽어 있었고, 코와 귀에 피가 나 있는 시신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채씨는 희생자 명단을 따로 작성해 보관했지만 42년간 꼭꼭 감췄다.
다랑쉬굴 희생자들은 종달리·세화리 출신이다. 채씨 등은 왜 다랑쉬굴까지 숨어들었을까. 이동현 연구원은 “1947∼48년 의식 있는 청년들의 집회나 모임이 제주도 곳곳에서 일어났어요. 경찰은 참여 청년들을 ‘불순분자’로 구분했어요. 이런 청년들과 그 가족까지 잡혀가서 고문당하거나 죽었습니다. 그냥 젊은 청년 혹은 그 가족이란 이유로 고문당하고 죽는 일이 숱하게 일어났어요”라고 설명했다. 다랑쉬굴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정부는 더는 4·3을 덮어놓고 부인할 수 없게 됐다. 더디긴 해도 이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2000년), 노무현 대통령 공식 사과와 정부의 첫 진상조사보고서 발간(2003년), 첫 희생자 국가보상 결정(2022년)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다만 살기 위해 깊이 들었을 뿐 마지막 숨이 막힐 때까지 서로를 놓지 않았다. 엄마는 한줄기 숨을 아이에게 주었고 연기의 소리가 인간에게 닿기를 기다렸다.’(다랑쉬굴 앞 표지석 글귀)
한 밭을 채우면 다음 밭으로… 서청의 악질적 학살, 북촌리
‘그것(까마귀)들은 시체가 널린 보리밭을 까맣게 뒤덮고 파먹다가 (…) 그 당시 일주도로변에 있는 순이삼촌네 밭처럼 옴팡진 밭 다섯 개에는 죽은 시체들이 허옇게 널려 있었다. (…) 까마귀들만이 시체를 파먹은 게 아니었다. 마을 개들도 시체를 뜯어먹고 다리 토막을 입에 물고 다녔다.’(현기영 소설가가 북촌리 학살을 배경으로 쓴 ‘순이 삼촌’ 중)
‘4·3’ 때 벌어진 제노사이드 가운데 잔인하고 악질적인 학살들은 대부분 서북청년회(서청)에 의해 벌어졌다. 평안도·황해도 등 서북지역 출신 향우회인 서청 소속 단원들은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뒤 군과 경찰에 특채돼 정식 계급장을 달고 ‘빨갱이 사냥’에 달려들었다. 1949년 1월17∼18일, 용암이 식으면서 형성된 주름진 넓은 돌밭 ‘너븐숭이’로 유명한 제주 동북부 해안 마을 북촌리에서 자행된 400여 명에 대한 ‘북촌 대학살’도 서청 회원 출신으로 구성된 ‘서청중대’ 소행이었다. 어린이, 노인은 물론 젖먹이를 안은 젊은 엄마도 희생됐다.
북촌리 앞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희생된 것이 발단이었다. 서청중대는 북촌초등학교에 주민들을 불러 모아 ‘마을 보초를 잘못 섰다’고 추궁한 뒤, 장대를 들고 ‘척’ 주민들을 갈라 세운 뒤 한쪽을 끌고 가 밭 하나당 40∼50명씩 총살했다. 한 밭이 다 채워지면 넘어가 다음 밭이 시신으로 채워질 때까지 마구 죽였다. 마을도 모두 불태워졌다. 마지막으로 학살이 이뤄진 밭은 지금의 ‘너븐숭이 4·3기념관’ 옆의 옴팡밭(오목하게 쏙 들어간 밭)이다. 옴팡밭 옆 너븐숭이에 북촌학살 때 희생된 아기들을 묻은 8기 이상의 ‘애기무덤’이 모여 있다.
이런 피맺힌 원통함에도 발설 자체는 오랫동안 금기시됐다. 1954년 1월23일 북촌초등학교에서 열린 한국전쟁 전사자 고별식에서 한 주민이 ‘오늘은 억울한 죽임을 당한 지 6주년 기념일이니 당시 희생된 영혼을 위해 묵념을 올리자’고 제안했다. 설움에 복받친 주민들이 대성통곡했다. 이 사실을 안 경찰은 주민들을 체포한 뒤 ‘다시는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풀어줬다. 이 사건은 ‘아이고 사건’이라 불린다.
옴팡밭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처럼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 형상을 쓰러진 돌비석으로 형상화한 조형물들이 채워져 있다. ‘두 아이를 잃고도 울음이 나오지 않은 것은 공포로 완전히 오관이 봉쇄돼버린 때문이 아니었을까?’ 돌비석 하나하나마다 소설 ‘순이 삼촌’ 속 글귀가 적혀 있다. 197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발표된 ‘순이 삼촌’은 4·3 학살을 공론화한 국내 첫 인쇄물이었다. 학살 장소였던 밭담 안쪽엔 74년 전처럼 보리가 자랐다. 담 따라 자란 송악덩굴에 검푸른 열매가 주렁주렁 맺혔다.
이승만의 독려 때문일까, 공식 희생자만 212명… 성산 터진목
썰물 때면 성산(일출봉)으로 이어지는 길목이 터진다(이어진다)는 의미의 성산읍 ‘터진목’은 성산·구좌 일대 주민들이 서청중대에 의해 고문·취조를 받다 끌려가 총살되던 학살터였다. 2020년 제주4·3평화재단 ‘제주 4·3사건 추가 진상조사보고서’를 보면 공식 확인된 희생자만 212명에 달한다. 2003년 첫 진상조사 때 홍성기씨는 “서북청년회가 대통령 이승만 사진을 해가지고 집에 돌아다니면서 사라고 했지. 우리 형님은 필요 없다, 그것뿐이었어…. 제일 억울한 것은 총으로 한번 쓰러지면 그걸로 죽어서 말면 좋은데 죽은 놈 위에 매질한다고, 총 쏴서 쓰러진 것을 대창·철창으로 시험한다고 막 찔러놨어. 그러니까 부모로서 동생으로서 그걸 눈으로 볼 수 없었지”라고 증언했다.
이런 광기 어린 살육의 동력이 무엇이었을까. 로버츠 미군정 고문단장은 1948년 12월18일 4·3 초기 초토화작전을 진두지휘한 송요찬 연대장을 칭찬하는 서신을 보냈고, 이에 대통령 이승만은 훈장을 수여했다. 또 ‘북촌 대학살’ 사흘 뒤 1949년 1월21일 대통령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이렇게 발언한다. “제주도, 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본색원하라.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해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 폭도가 많을수록 학살이 정당화되는 구조였다. 많이 죽였다고 상 주고, 더 죽이라고 독려했다.
노란 유채꽃, 보라 갯무꽃 활짝 핀 올레길(1코스) 옆으로 ‘해돋이 명소’인 성산을 바라보는 곳에 추모공원이 조성돼 있었다. 위령비 뒤로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런데 ‘오도균의 자’ ‘김광수의 처’ 같은 서글픈 글귀가 눈길을 쉽게 놓지 않았다. ‘왜 이 희생자들은 이름조차 갖지 못한 걸까.’
“‘○○○의 자’는 아직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거나 이름을 말해줄 부모가 모두 희생된 아이들의 경우고, ‘○○○의 처’는 결혼은 했는데 혼인신고를 안 해 호적이 없는 여성으로 누구의 처인 건 알지만 그 이름을 몰라 적을 수 없는 사례예요. 서청중대는 일가족 남녀노소 구분 없이 끌고 와서 한꺼번에 죽였어요. 우리는 ‘그 어린애가 뭘 안다고 걔까지 죽이느냐’고 하지만 당시 서청중대는 ‘빨갱이의 새끼니까 애기도 빨갱이’라는 식으로 죽인 거죠.”(이동현 연구원)
뒤처리가 쉬워서 학살터가 된 관광 명소… 표선해변과 정방폭포
넓은 백사장으로 유명한 표선해변은 제주말 이름도 ‘한모살’, 즉 넓은(한) 모래밭(모살)이다. 터진목에서 남쪽으로 해안을 따라 차로 20분 거리다. 표선·남원 지역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굴비처럼 묶여 쫄쫄쫄 끌려와 해변에 파놓은 구멍 앞에서 총살”(홍춘자씨 증언)돼 집단학살되던 곳이었다. 공식 확인된 희생자만 230여 명이다.
서쪽으로 해안 따라 차로 40분을 가면 산남지역(한라산 남쪽 지역) 대표 학살터인 정방폭포·소남머리가 나온다. 250여 명(공식 확인)이 집단학살됐다. 학살 뒤처리가 손쉽다는 이유로 높이 27m 국내 유일의 해안폭포는 시신이 겹겹이 쌓인 학살터가 된다.
1948년 11월7일 무장대가 서귀포 일대를 습격한 사건이 있었다. 서청중대는 애먼 중산간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보복 학살을 벌였다. 11월에만 10회 이상 주민을 집단 총살했다. 1949년 1월22일 대부분 어린이·여성·노인으로 구성된 주민 80여 명을 정방폭포에서 죽여 아래로 떨어뜨렸다.
토벌대는 정방폭포 희생자에 대한 시신 수습도 허락하지 않았다. 수개월, 길게는 1년 뒤 시신 수습을 위해 정방폭포를 찾은 주민들은 시신이 이미 썩어버렸거나 파도에 휩쓸려간 바람에 가족을 찾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일부 가족은 시신이 없는 무덤인 ‘헛묘’를 만들었다.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한참을 피와 눈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정방폭포를 빠져나왔다. 잎이 모조리 떨어진 채 새빨간 열매가 가지마다 가득 찬 먼나무들이 섬뜩하게 서 있었다.
내려오면 살려준다 거짓말로 꾀어내… 섯알오름 탄약고터
1949년 3월 이승만 정부는 제주 중산간에 피신 중이던 주민들에게 “내려오면 살려준다”고 ‘귀순’을 제안했고 많은 주민이 백기를 들고 하산했다. 거짓말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10월2일 하산자 등 249명을 정뜨르 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서 집단 처형했다. 또 군법회의를 통해 2530명, 일반재판으로 1562명을 판결문도 없이 육지 형무소에 수감했고 한국전쟁 발발 뒤 학살했다.
법에도 없는 ‘예비검속’(미래에 죄를 저지를 수 있다며 미리 구금하는 것)을 한다며 4·3 관련자라는 이유로 교사·학생·공무원·마을 유지 등을 잡아들인 뒤 1950년 7∼8월 3000여 명(추정)을 집단학살했다. 정방폭포에서 차로 40여 분 거리 섯알오름 인근 일본군의 옛 탄약고터에서도 예비검속자 218명이 총살당했다. 당시 희생자들은 자기 죽음을 예상하고 검은 고무신을 벗어 던지며 가족에게 가는 길을 알렸지만, 국군은 시신을 가져가지 못하게 7년 동안 접근을 금지했다. 어렵게 시신을 수습한 유족은 위령비를 세웠다. 하지만 1961년 6월 이번엔 경찰이 위령비를 파괴했다. 당시 학살터 추모비엔 눈물의 검정 고무신들이 모셔져 있다.
그럼에도 유족들은 이곳 안내판에 이렇게 썼다. ‘유족들의 가슴에 50년의 한으로 응어리진 이곳을 탈바꿈해 천부적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깨우치는 역사박물관으로의 전환을 기대해본다.’
팔다리 부러지게 구타하고 총살, 무등이왓
지형이 춤추는 어린이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은 ‘무등이왓’(안덕면 동광리)은 130여 가구가 살던 큰 마을이었다. 하지만 1948년 11월15일 토벌대는 소개령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주민들을 집합시킨 뒤 10여 명을 불러 팔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구타했다. 육신이 온전한 몇몇만 도망치고 나머지는 모두 총살당했고, 마을을 몽땅 태워버렸다 . 150여 명이 학살되거나 도주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
㈔제주다크투어의 소개로 생존자 홍춘호(86) 할머니를 만나 당시 상황을 들었다.
“11살 때예요. 원래는 동광리가 산간치곤 부자 마을이었어요. 연자방아가 5개 있었어요. 토벌대가 젊은 남자들만 부르더니 10명을 죽였어요. 그때가 1948년 11월15일이었어요. 왜 죽였는지 우리는 이유를 몰라요. 내려오라 한 것도 우리가 모를 때였어요. 그다음부터는 집도 다 불타니 굴에 숨어 살았고요. 친척이 있는 사람은 해안으로 내려간 사람도 있지만 못 내려간 사람은 폭도가 된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토벌대가) 올라와서 사람 목숨만 보면 다 죽였어요. 우리는 굴속에 12월 말까지 40여 일을 숨었어요. 춥고 굶주리고 하니까 동생 셋이 다 죽었어요. 산속 큰넓궤(넓은 동굴)에서 엄마·아빠하고 셋만 살아남았어요. 나와서 또 다른 굴에서 살았어요. 이듬해 3월 토벌대가 뿌린 삐라를 보고 내려왔어요. 경찰이 서귀포 단추공장에 가둬서 우리가 몇 개월 동안 살았어요. 그 뒤에 ‘죗값 다 치렀다’ 나가라 한 게 그해 12월이었어요. 밖에서 우리를 ‘폭도새끼’ ‘석방쟁이’라고 손가락질했어요. 그때부터 소 기르는 소막(외양간) 한쪽에서 소랑 같이 살았어요. 소똥·말똥에 불붙여서 불 쬐고, 옷도 징역살이 때 입던 거 말고는 없었어요. 마을에 쫓겨나고 3년을 이불도 없이 살았어요.”
7년7개월 뒤 통행금지 해제,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주정공장
홍춘호 할머니가 갇혔던 서귀포 단추공장에 해당하는 제주시내 ‘귀순자’ 수용소는 ‘옛 동양척식회사 제주 주정공장 고구마창고’였다. 제주국제공항에서 10분 거리다. 이 창고터에는 2023년 3월13일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이 들어섰다.
‘1954년 9월21일 한라산 통행금지가 해제되면서 제주 4·3사건은 7년7개월 만에 종결된 듯 보였지만 끝은 아니었다. 제주도민과 생존 희생자, 희생자 유족들은 이념적 공세에 시달렸고 연좌제로 인해 장래가 막혔다. (…) 수십 년 동안 억울하다는 호소 한번 하지 못한 채 숨죽여 살아야 했다. 21세기 들어서야 (…)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있었고 정부 차원의 추념식이 열리고 있다.’(‘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 전시물 글귀)
2023년 제75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을 앞두고 여당인 국민의힘 태영호 최고위원은 “4·3은 북한 김일성 지시로 촉발됐다”고 하는 등 그간의 진상조사 결과와 다른 내용을 사실인 양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추념식 당일엔 ‘서북청년회’라는 이름의 극우단체가 4·3 유족들을 가리켜 “공산주의자”라며 난동을 부렸다. 윤석열 대통령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추념식에 불참했다.
“서청 망령들이 되살아나는 것 같네요.” 허영선 제주4·3연구소장은 말했다.
“기억이 말살당한 곳에는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가 없는 데는 인간의 존재가 없는 겁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사람이 아닌 주검과 같은 존재입니다.”(소설가 김석범의 2015년 ‘4·3평화상’ 수상 소감 중)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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