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기생충' 그림으로 2막 연 지비지 작가 "미국서도 많이 알아봐"
美 넘어와 LA아트쇼 진출…"미국 예술계 주류 무대 입성"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임미나 특파원 = "'기생충' 속 그림을 미국에서도 많이들 알아봅니다. 과분한 평가를 받을 때마다 어깨가 무겁지만, 코로나19도 지나갔으니 이제 미국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영화 '기생충' 속 그림으로 작품을 각인시킨 작가 지비지(ZiBEZI·본명 정재훈·43)는 9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LA) 한국문화원에서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이런 포부를 밝혔다.
지비지는 '기생충'에서 주요 무대인 부잣집 아들 '다송'의 그림을 실제로 그린 작가다. 극 중 다송은 어느날 밤 지하실에서 올라온 낯선 남자와 마주치고 충격을 받은 뒤 그림으로 이를 표현한다. 아이가 그린 것이어서 단순하면서도 분열된 정신세계를 드러낸 것이 특징인데, 지비지 작가의 그림은 이런 설정에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영화 속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자주 등장하다 보니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대부분 이 그림을 기억하게 된다.
봉준호 감독은 이 그림을 맡을 작가를 직접 발탁했다고 한다.
지비지 작가의 기억에 따르면 2018년 봉 감독 측에서 연락이 왔다. 첫 만남에서 봉 감독은 그의 그림을 인스타그램에서 봤다면서 '기생충' 시놉시스를 건넸다. 이어 영화에 쓸 그림을 의뢰하면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그림이 될 테니 잘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지비지 작가는 "사실 그 당시에는 영화 줄거리를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어렴풋한 느낌만으로 그리고 또 그렸다"고 돌아봤다. 그렇게 석 달 가까이 40여점을 그렸고, 그중 10여점이 영화에 들어갔다.
영화 속에서 가장 중요했던 그림은 그리면서도 '이거다' 싶은 느낌을 받았고, 봉 감독의 '오케이' 사인을 받은 순간 "우주로 날아갈 것 같았다"고 그는 회상했다.
이듬해 영화가 개봉되면서 그는 봉 감독의 제안으로 미국 시사회에 동행해 약 3개월간 그림 전시회를 함께 열었다.
LA CGV에서 열린 시사회에는 영화 개봉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참석했다. 이 부회장의 초청으로 함께 온 미국 팝 음악계 거장 퀸시 존스가 그림을 보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바스키아"라고 외쳤다고 한다.
'검은 피카소', '천재 화가'로 불린 미국의 전설적인 그라피티 작가 장-미셸 바스키아에 견준 것이다.
이후 2020년 2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4관왕을 차지하고 미국에서 뜨거운 반응이 이어지자 그는 미국으로 아예 근거지를 옮기게 됐다.
하지만 LA에 오자마자 코로나19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외부 활동은 모두 중단됐다. 이후 3년 가까이 집안에서 그림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2021년 겨울 LA에서 연 첫 개인전에는 예상보다 많은 관람객이 왔다고 한다.
"3년 동안 여기 있으면서 한인들과 소통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전시에는 교민이 아닌 미국인들도 많이 왔더라고요. 교민 중에는 오히려 '기생충'을 안 본 분들이 꽤 있었는데, 다른 미국인들은 다들 '기생충'을 봤다고 해서 놀랐죠."
코로나19 사태가 거의 잦아들면서 올해부터는 LA에서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게 됐다.
지난달 미 서부 최대 규모의 현대미술 박람회인 'LA아트쇼'에 초청받아 작품을 선보였고, 이달 6∼28일에는 LA 한국문화원의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한국과 미국의 당대 주요 작가 2인 중 하나로 초청돼 작품 32점을 전시한다.
한국문화원 특별전을 협업한 LA아트쇼 예술감독 브렌다 리는 "LA아트쇼에서 전시한 것은 미국 주류 미술계에 들어와 인정받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영화 '기생충' 효과도 있지만, 지비지 작가의 다른 작품에도 반응이 뜨거웠다"고 전했다.
거침없는 선과 강렬한 색채가 특징인 그의 화풍은 독특한 인생 역정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지비지 작가는 1998년 '후니훈'이란 이름으로 힙합 음악계에 데뷔해 래퍼로 활동했다.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 시즌 1에 출연했고, 이동통신 'TTL' 브랜드 광고에도 출연했다. 당시 광고 속에서 "북치기 박치기"를 반복하는 비트박스 영상은 한때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결국 음악으로는 빛을 보지 못하고 2015년 활동을 완전히 접었다.
"음악을 내려놓고 불현듯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붓과 물감, 마커를 잔뜩 사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릴 때마다 머릿속이 지우개로 지운 듯 텅 비는 느낌이 정말 좋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그리게 됐죠."
집에서 그림만 그리다 보니 친구들이 전화해서 '어디냐'고 물을 때마다 "집이지"를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아이디어를 얻어 예명을 '지비지'로 지었다.
완성한 그림이 쌓여가면서 2016년부터 인스타그램에 작품 사진을 올렸고, 그림을 직접 보거나 사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면서 한국에서 첫 전시회를 열고 작가로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미술을 제대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그만큼 기존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강점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펜을 갖고 노는 걸 좋아했던 게 그림으로 간 것 같다"며 "아직은 피카소나 바스키아와 닮았단 얘길 많이 듣는데, 점점 저만의 색깔을 찾는 게 가장 큰 목표이다. 제가 누구인지 스스로 알아가는 여정이기도 하고…"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나중에는 쇼케이스처럼 음악과 함께 그림을 보여주거나 팀 버튼 감독처럼 상상력이 넘치는 전시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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