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를 보채는 대통령[오늘을 생각한다]

2023. 4. 10.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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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7일은 ‘윤 일병 사망 사건’ 9주기였다. 9년 전, 소속부대 대대장은 윤 일병 어머니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용서는 나를 위로하고 안식을 주는 힐링입니다. 과거를 용서하고 미래와 진정한 가치를 위해 생각을 바꿔보십시오.” 윤 일병은 선임병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하다 사망했다. 그런데 육군은 대뜸 ‘만두 먹다 질식사’한 사람으로 둔갑시켜 놨다. 가족들은 장장 4개월을 그렇게 속고 살다 군인권센터를 통해 진실을 접했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군은 단 한 번도 이에 대해 사과한 적이 없다. 아예 사인 조작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용서도 대상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죄지은 게 없다는데 무슨 수로 용서를 한단 말인가. 문자가 대중에 공개되자 사람들은 다 대대장이 미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휘하부대에서 대낮에 폭행으로 병사가 죽어 나간 마당에 어떻게 용서를 입에 올릴 수 있냐며 분노가 폭발했다. 힐링을 운운하던 그는 얼마 뒤 직무유기로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그 황당한 문자가 다시 떠오르는 나날이다. 일본에 다녀온 윤석열 대통령은 강제동원 피해 제3자 변제안 발표로 후폭풍이 거세지자 지난 3월 21일 사실상의 대국민담화를 진행했다. 대통령은 담화에서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면서 “한·일 양국 정상의 선언이 과거사 인식 문제를 매듭짓고, 평화와 번영을 향한 공동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초석이 될 것”이라 자신했다. 피해자들에겐 “아픔이 치유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뿐이었다.

담화문을 듣자마자 대대장의 문자를 떠올렸다. 아무도 피해자들에게 와서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제3자인 대통령이 나타나 과거를 용서하고 미래의 진정한 가치를 고려해보라는 글줄을 읊는다. 회담이 잘돼 동포사회는 축제 분위기라는 말도 덧붙인다.

일본에 다녀온 뒤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건 국민이 반일주의에 세뇌된 외골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피해자들은 모두 원치 않는 해결 방안을 합의해놓곤 보여준 일련의 태도가 기막히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겐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하다못해 설득이라도 해보려는 일말의 의지조차 없어 보인다. 여당은 아예 ‘국익 vs 반일’ 프레임을 짜서 온 동네에 도배해놨다. 대통령의 결단에 반대하면 국익을 해치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제3자 변제안에 반대하는 피해자는 대한민국의 이익에 반하는 사람들인가? 온 세상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국가의 이름으로 용서를 강압하고 있는 셈이다.

상대가 미안해 보여야 피해 입은 사람도 마음에 용서의 집을 지을 수 있다. 얼마 전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씨가 광주 시민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자 꼭 안아주던 5월 어머니들을 보며 다시 느낀다. 눈물 흘리는 이에게 용서를 보채는 건 폭력이다. 자리에 주저앉아 우는 국민을 보채 가해자와 함께 장밋빛 미래로 떠나려는 대통령. 그가 말하는 ‘국익’은 누리고 싶지 않다.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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