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정상회담 앞두고 ‘美 감청’ 돌출… 韓 “진상 파악” 신중

유태영 2023. 4. 10.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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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유출 美 기밀문건 파장
대통령실 “美와 필요한 협의”
우크라에 살상무기 지원 관련
김성한·이문희 대화도 포함
“한·미동맹은 굳건” 강조 기류
안보실장 회의 열어 대응 논의
튀르키예, 러 지원 시사 폭로
NYT “동맹 관계 저해” 지적

“이 문제(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대한 명확한 입장 없이 (한·미) 정상 간 통화를 할 수는 없습니다. 전쟁 중인 나라에 살상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공식적으로 변경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입니다.”(이문희 전 대통령실 외교비서관)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발표가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입장 변경 발표와 동시에 이뤄지면 대중은 (한·미) 양국이 거래를 한 걸로 받아들일 텐데요.”(김성한 전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
윤석열 대통령(왼쪽)이 2022년 11월 13일(현지시간)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한 호텔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프놈펜=연합뉴스
최근 온라인상에 대량 유포된 미국 기밀 문건 중에 들어 있는 한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주요 관계자의 대화라고 뉴욕타임스(NYT)가 8일(현지시간) 보도한 내용 일부다. 미국 안보·정보 기관이 우리 NSC를 도·감청해 확보한 내용이다. 이달 말 윤 대통령의 방미를 앞두고 한·미 관계에 악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2013년에도 미 국가안보국(NSA)이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 주미 한국대사관 등을 도청한 사실이 폭로된 적이 있다.

보도에 따르면 문건에는 두 사람이 우크라이나 지원에 관해 고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임기훈 국방비서관이 3월2일까지 우크라이나 지원에 관한 최종 입장을 결정할 것이라는 언급이 있는 점, 문건의 최초 유출 시기가 지난 2월28일인 점 등으로 미뤄 해당 논의는 두 사람이 교체되기 한 달쯤 전인 지난 2월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건에는 “이 비서관은 ‘미국의 탄약 요청을 받아들일 경우 최종 사용자가 미국이 아니게 된다면 정부가 곤경에 빠질 것’이라고 했다”며 “한국 관료들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 압력을 가할 것을 우려했다”고 적혀 있다.

또 김 전 실장이 “미국의 궁극적 목적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신속한 지원이므로 (무기·탄약 공급 루트인) 폴란드에 155㎜ 포탄 33만발을 판매하는 것은 어떠냐”고 ‘우회 지원’ 방안을 제안하자 이 전 비서관이 ‘폴란드가 최종 사용자여야 한다는 확약’을 받는 것을 전제로 동의한 사실도 담겼다. 지난해 11월 미국이 한국에서 155㎜ 포탄 10만발을 구매하면서 우회 지원 논란이 불거졌는데, 이후로도 미국 측의 탄약 지원 요구가 계속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이 문건은 출처를 전자 도청, 통신 감청을 뜻하는 ‘신호정보’(Signals Intelligence·시긴트)라고 밝히고 있다. 미국이 도·감청을 통해 한국 정부의 내부 논의를 감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대통령실은 “제기된 문제에 대해 미국 측과 필요한 협의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태용 국가안보실장은 이날 내부 회의를 열어 대응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윤 대통령도 관련 내용을 보고받고 해당 사안을 잘 살펴보라는 취지의 지시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모습. 연합뉴스
다만 대통령실은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여러 차례 불거졌지만 한·미 관계를 근본적으로 흔들 정도는 아니었고, 한·미동맹은 여전히 굳건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미 저자세 논란이 우려되는 대목이다. 2013년에 이어 이번에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을 경우 앞으로도 우리 정부에 대한 미국의 도·감청 시도가 계속될 수 있어서다.

한국 외 다른 동맹·우방국도 미국의 감시망에 있었다. 미국은 시긴트를 통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일원인 튀르키예, 중동의 우방국인 이스라엘 관련 정보도 파악한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캐나다 등 동맹국의 첩보 활동에 대한 언급도 들어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국의 동맹국들이 (유출 문건의) 세부 내용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때로는 분노했다”고 전했다. NYT는 “도청 사실이 공개된 것은 한국 등 주요 파트너 국가와의 관계에 해가 된다”고 지적했다.

문건 중 하나는 러시아의 민간 용병업체 ‘와그너그룹’ 측이 우크라이나와 말리 전장에서 쓸 무기·장비를 사려고 튀르키예 관계자를 만났으며, 아시미 고이타 말리 임시대통령이 “와그너그룹을 대신해 튀르키예로부터 무기를 사주겠다”는 확약을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말리를 통한 무기 우회 공급 논의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과 관련해서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추진 중인 입법부 우위 구도의 ‘사법정비’와 관련해 첩보기관 모사드의 고위 관료들이 지난 2월 모사드 요원들과 이스라엘 시민들의 반정부 시위 참여 등을 옹호했다는 민감한 내용이 적시됐다.
성조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AP연합뉴스
일급 기밀만 100건 이상인 것으로 파악되는 유출 문건의 상당수는 마크 밀리 미 합동참모의장 등 국방부 고위 관료에게 보고하기 위한 용도로 지난겨울 작성된 것이라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대부분 우크라이나 전황, 무기 비축량, 서방의 지원 규모 및 추가 지원 계획에 관한 내용들이다. 전사자 숫자가 조작된 최소 1건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진본 문서가 맞는다고 미 국방부는 설명했다.

문건에는 국방부뿐 아니라 NSC, 중앙정보국(CIA), 국방정보국(DIA), 국가정찰국(NRO) 등의 첩보 활동 결과도 담겨 있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일부에는 외국과 공유하지 않는 기밀 문서라는 의미인 ‘Secret/NOFORN’ 표시가, 다른 문서엔 미·영·캐나다·호주·뉴질랜드 ‘파이브 아이즈’ 등 가까운 동맹에만 제공할 수 있다는 표시가 돼 있었다.

미 당국은 지난 6일 NYT의 첫 보도 전까지 유포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밀 내용은 문건을 찍은 사진 형태로 지난 2월28일, 3월2일 게임 채팅 플랫폼 디스코드(Discord)에 처음 공유됐다. 국방부는 기밀 취급에 관한 통제 수위를 높이고 자체 진상 조사에 착수했다. 법무부도 유출 경위 수사에 나섰다.

유태영·이현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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