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 그 사연] “민들레 홀씨처럼~” 결혼 축가로 사랑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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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빠질 수 없는 꽃이 민들레다.
가요계에는 민들레를 소재로 한 히트곡이 한두개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진미령의 '하얀 민들레'다.
노래를 부른 진미령은 가수이자 DJ로 인기를 끌었고 이후 요리책 저자, 김치 사업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화교로 알려졌다.
1976년 고등학교 졸업 후 대만 유학을 준비하다가 가수 장욱조의 권유로 가요계에 데뷔했고 예명 진미령을 사용한 것이 오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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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빠질 수 없는 꽃이 민들레다. 개나리·벚꽃·진달래·철쭉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진 못하지만 화단이나 들판에 자리 잡고 핀 모습이 가장 민초적이라고 할까?
가요계에는 민들레를 소재로 한 히트곡이 한두개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진미령의 ‘하얀 민들레’다. 이 노래는 1979년 김자옥·박근형이 주연한 동명의 MBC 드라마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각본을 쓴 신봉승이 노랫말을 지었다. 노래가 큰 인기를 얻기도 했지만 ‘철부지 딸이 엄마 품을 떠나 민들레 홀씨처럼 돌아오지 않는다’는 내용의 1절 가사 때문에 결혼식 축가로 사랑받은 노래이기도 하다. 노랫말은 이렇다.
“나 어릴 땐 철부지로 자랐지만 지금은 알아요. 떠나는 것을.
엄마 품이 아무리 따뜻하지만 때가 되면 떠나요. 할 수 없어요.
안녕 안녕 안녕 손을 흔들며 두둥실두둥실 떠나요.
민들레 민들레처럼 돌아오지 않아요. 민들레처럼.”
노래를 부른 진미령은 가수이자 DJ로 인기를 끌었고 이후 요리책 저자, 김치 사업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화교로 알려졌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그가 본래 한국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그는 1977년 대만 배우 진추하 내한, 1984년 LA 올림픽, 1988년 서울 올림픽, 1990년 베이징 올림픽 때 자원봉사로 중국어를 통역한 것이 언론에 보도됐고, 중국 성인 진(陳)씨이니 당연히 화교라고 받아들여졌던 것.
과연 진미령은 누구일까? 그는 1958년생으로 본명은 김미령이다. 그런데 부모가 중국과 인연이 있어 화교들이 다니는 한국한성화교중고등학교를 다녔다. 1976년 고등학교 졸업 후 대만 유학을 준비하다가 가수 장욱조의 권유로 가요계에 데뷔했고 예명 진미령을 사용한 것이 오해의 시작이었다. 이후 그는 1977년 16세 작곡가 장덕에게 받은 ‘소녀와 가로등’으로 서울가요제에 출전하면서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장덕이 만 28세 나이로 요절하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소녀와 가로등’은 더이상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한 사람이 다른 자아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불교 경전 <법구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활 만드는 사람은 화살을 곧게 하고 목수는 재목을 다듬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다룬다.” 진미령은 자기 능력을 잘 다뤄 1970∼1990년대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한 시기에 제 역할을 펼친 지혜로운 가수가 아닌가 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익명의 댓글을 달고, 부캐(부캐릭터)로 자신을 표현하는 시대에 진미령은 진정한 자신의 자리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가수가 아닐까.
박성건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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