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자유민주주의 슬로건 아래 국가 폭력·야만성 정당화”
개발의 시대가 초래한 폭력 역사
한강의 기적 이면 한강의 저주 쌓여
“내 소설의 대부분 주제 약육강식
어떠한 사회도 문제 해결 불가
단어는 삶의 구체성 확보하는 일”
“언론 당파성 매몰, 중립적 저널리즘 없어진지 오래”
◎ 김훈 작가 =작가는 자신의 약력이 두줄을 넘지 않기를 바랐다. 수상경력도 제외해 달라 했다. 작가 김훈을 이렇게 소개한다. 1948년 서울 출생. 장편소설 ‘칼의 노래’,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 산문집 ‘연필로 쓰기’ 등이 있다.
조선 제1검(劍)이 아니라 ‘조선 제1필(筆)’의 작가 김 훈이 지난 5일 춘천을 찾았다. 그는 전국적인 베스트셀러 ‘칼의 노래’, ‘남한산성’, ‘하얼빈’ 등을 펴냈다. 한림대 도헌학술원(원장 송호근)이 마련한 제1기 시민지성 한림연단 연사로 나선 김 훈 작가는 자신의 생애를 관통한 한국 현대사, 자신의 문학세계, 언론과 글쓰기 등 다양한 주제로 시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김 훈 작가는 특유의 간명하고 정확한 표현으로 유명하다.
김 훈의 이날 특강은 약육강식과 폭력의 시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김 훈은 6·25전쟁 당시의 피난행렬로 말문을 열었다. 김훈은 “당시에는 어려서 몰랐지만 나중에 신문기사를 찾아보니 피난열차 지붕에는 피난민들이 가득찼고 적지 않은 이들이 떨어져 죽었다. 그러나 객실 안의 풍경은 달랐다. 고관대작들이 피아노를 싣고, 응접세트를 싣고, 개집을 싣고, 요강을 싣고 부산으로 향했다. 관용차와 지프차를 피난길에 끌고 나왔다. 오죽하면 정부 당국자들이 ‘피난 갈 때는 관용차를 동원하지 말라’는 특별메시지를 냈을까. 나는 이런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이어 펼쳐진 한국 현대사가 그에게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았다. 김 훈은 4·19혁명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김 훈은 “중학교 때 4·19가 터졌다. 경찰들이 시위하는 대학생들의 머리통을 곤봉으로 때렸다. 마치 수박을 깨트리는 것 같았다. 동네 어머니들이 울면서 학생들을 집으로 끌고 나갔다. 이불을 찢어 지혈을 했다. 무허가 주택을 부시는 공무원들과 학생들을 때리는 경찰들이 비슷해 보였다. 이 세상이 무섭고 국가가 무서웠다”고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개발의 시대가 초래한 야만과 폭력도 언급됐다. “먹고 살 길 없는 농어촌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왔다. 기억나는 것은 무허가주택을 철거하는 풍경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집을 부숴 아비규환이 됐다. 모든 땅은 국유지 아니면 사유지였다. 땅이 없으면 살 권리가 없고 땅을 가진 자는 때려부술 권리가 있다. 성남에 민란에 가까운 폭동이 있었고 개발의 역사가 그때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한강의 기적은 경제개발과 함께 불평등과 부패의 역사로 남는다. 김 훈은 “나의 시대에는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밥을 못 먹는 나라에서 자동차가 넘치는 나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기적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강의 저주가 쌓여갔다. 불평등, 비리, 차별, 부조리가 우리 사회 바닥에 깔렸다. 내가 살아온 시대의 모습이다. 나의 시대에 속하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솔직한 자기 고백”이라고 말했다.
개발의 시대, 폭력의 시대를 지나 새롭게 맞이하는 2023년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윤석열 정부의 화두인 ‘자유’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김 훈은 “나는 자유라는 말을 들으면 두렵고 소름끼친다.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얼마나 많은 학살과 박해와 추방과 억압이 자행됐는가. 나는 직접 봤다.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슬로건 아래서 국가 폭력과 야만성이 정당화 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운을 뗐다. 이어 “지금 말하는 자유는 시장의 자유, 기업의 자유, 거래의 자유, 경쟁의 자유, 계약의 자유, 투자의 자유, 자기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자유, 욕망의 자유가 대부분이다”라며 “그러나 개인의 자유와 기업의 자유를 확대하면 거기에 비례해 자유의 가치가 더 고양 되는게 아니다. 오히려 반비례해서 자유의 가치가 훼손되는 게 아닌가 싶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유는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실험하듯 이뤄지는 개념이 아니다”라며 “현실 사회에 적용이 돼야 하는데 자유의 영역을 확대한다고 해서 가치가 고양되지 않는다. 나의 삶의 경험칙에 의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70여 년 살다보니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내가 쓴 소설의 대부분은 약육강식이 주제다. 수많은 혁명으로 약육강식에 저항해왔다. 그러나 어떠한 사회도 약육강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글쓰기로 연결됐다. 단어까지 온전히 자기 것으로 끌어안아야 했던 김훈은 이렇게 얘기했다. “나의 언어, 나 자신의 언어로 ‘사랑’을 쓴 적이 없다. 내가 그 단어를 장악할 수 없어서 였던 것 같다. 단어는 삶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일이고 삶에서 구현이 돼야 한다.” 문장 속의 단어는 곧 김 훈 자신이고 그것은 곧 자유의 또다른 표현인 듯 싶다. 김 훈은 “난폭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거울 두 개를 마주대면 그 속으로 허상이 무한대로 뻗어나간다. 다 가짜다. 개념으로 개념을 설명한다는 건 허상의 지옥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라며 “그 지옥에 빠져나오지 못하면 ‘망하는 것’이고, 글을 쓰는 자가 ‘침묵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 참석자들과의 일문일답
-한국어의 달인이다. 한국어를 쓰고 있는 사람이 점차 줄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어가 세계에 대놓고 자랑할만한, 위대하고 과학적인 언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국어로 법전을 쓸 수가 없다. 중요한 얘기다. 법전을 자기 모국어로 쓴다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하다. 법을 보면 한국어로 할 수 있는 것은 조사와 종결어미 정도다. 한자가 아니면 법을 쓸 수가 없다. 우리가 데모크라시를 민주주의라고 하고 프리덤은 자유라고 한다. 이런 단어들은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인들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한자를 이용해 만든 개념이다. 훌륭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개념이 동양에는 없었다. 이런 단어를 한글로 대체할 수 있느냐. 대체가 안된다. 한글로는 할 수 없는게 얼마나 많은가. 내가 사랑하는 한글을 폄하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모국어가 처한 운명을 정직하게 말하고 알아야 된다. 세종대왕은 한국어를 만든 분이 아니라 한글 알파벳을 만든 분이다. 한글은 정말 우수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어서 세계에 자랑거리다. 한국어는 아직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더 세련되고 다듬고 더 가꾸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약육강식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요새 저출산 현상 역시 약육강식에 젊은 이들이 저항하는 의미로 봐야 하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출산율이 저하된다는 것은 젊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정나미가 떨어진거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정나미가 떨어져서 애를 안 낳는 것이다. 학을 떼는거지. 자식을 낳아서 기를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것이다. 정부 공식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사교육비 지출 총액은 27조에 달했다. 정부의 문화예술 예산 총액은 7조에 불과했다. 이러니 애낳을 엄두가 나겠는가.”
-글쓰기가 고통스러울 때도 있는지.
“글을 쓰면서도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한다. 이게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자기의 사상과 구상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장인적인 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 글을 쓰면서 자부심이나 행복감을 느낀 적도 없다. 망설임과 머뭇거림, 모자람이 매일매일 나를 짓누른다. 날마다 불완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기자 출신이다. 최근 언론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지금 언론은 당파성에 매몰되어 있다. 이 시대의 정치적 언어의 주류는 욕지거리, 쌍소리, 거짓말, 악다구니, 가짜뉴스, 고함, 이런 것 아닌가. 언론이 그걸 옮겨서 보도해야 되니까 언론에 의해서 증폭된다. 확성기가 되는거다. 그런 욕지거리 속에 진보나 보수의 가치는 없고 당파성만 있다. 내가 어떤 정당의 누구를 지지하느냐에 악다구니의 방향이 좌우된다.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존재하는 어떤 중립적 저널리즘. 그런 의미의 저널리즘은 없어진지 오래다. 언론은 그 하나의 당파적 세력, 이념적 편향성으로 존재한다. 내 말이 과장됐을 수는 있지만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작가의 소명은 무엇인가.
“젊었을 때 나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로맨틱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꿈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젊은 시절 꿈은 대기업 생산담당이었다. 밥을 못 먹는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밥 잘먹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TV나 냉장고를 만들어 국민들에게 싼 값에 공급하고 나도 그 댓가로 잘 살기를 바랐다. ‘그 시대 젊은이들의 아주 훌륭하고 정당한 꿈’이었다. 소설가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나를 표현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내 이름 두 글자가 문학사에 남느냐 남지않느냐에 대해서 정말 사소한 관심도 없다. 앞으로 작품 2개 혹은 3개를 더 쓰고 가려고 한다. 구체적 소재는 답하기 곤란하다. 영업 비밀이다.” 정리/오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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