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우체통을 찾아라' 26개월 스토킹 피해자 극단 선택 "죽어서라도 벗어나고 싶어"

<스토킹범죄의 인격살인>
이별 통보받고 2년 넘게 피해자 불법촬영 협박
피해자 조롱·모욕에 허위문자로 극단선택 유도
"선택해 공주, 동네방네 녹음파일을 재생한다"
고인 유품 정리하다 가족이 스토킹 흔적 발견
가해자 반성도 안해… 檢, 스토킹법 위반 기소

대학생·청년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9월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앞에서 스토킹 살해 사건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21년 11월 18일 오전 6시.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예정된 날이라 수험생들을 위한 긴급 수송 차량들이 도심 속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뿐, 여명이 밝아오던 거리는 대체로 한산했다.

그 시간, 한 여성이 한강 다리 위에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간간이 휴대폰으로 통화를 몇 차례 했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인 여성은 곧바로 한강 물을 향해 발을 힘껏 굴렀다. 찰나의 순간,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고 여성은 9시간이 지나서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가족들은 슬픔보다 황망함이 앞섰다. 부모는 유서도 남기지 않고 떠난 딸의 선택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죽을 아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황망함은 이내 아연실색으로 바뀌었다. 동생 유품을 정리하던 언니가 옛 남자친구에게 당한 수년간의 스토킹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숨진 여성은 클라우드(인터넷 개인 서버)에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그동안의 고통을 남겨두고 있었다. '자살할 수 있다면 쉽게 죽을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죽어서라도 (너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야.' 2021년 12월 4일 유족들은 그녀의 유품인 휴대폰을 들고 경찰서를 찾았다.

26개월... 가족에게도 알리지 못한 지옥의 시간

여성의 휴대폰은 10개월 만에야 잠금이 해제됐다. 그 속엔 '지옥'이 담겨 있었다. A씨에게 이별을 통보한 시점은 2019년 9월. 휴대폰엔 2019년 9월 5일부터 여성이 극단적 선택을 할 때까지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고인을 괴롭힌 흔적이 가득했다.

괴롭힘의 대부분은 협박이었다. 불법 촬영물이 있다며, 가족과 지인들에게 다 퍼뜨리겠다는 위협이 있었다. 불법 촬영물이 담겼다면서 편지봉투 수십 개가 쌓여 있는 사진을 카카오톡으로 보내는가 하면, 'ㅋㅋㅋ 선택해 공주, 동네방네 녹음파일을 재생한다''서버 연다. 장난인 줄 아냐. 유튜브 보시기 바란다고 (너네 부모님께) 전해주라' 등의 문자를 보내면서 자신과 계속 만날 것을 종용했다.

조롱과 모욕도 서슴지 않았다. 두려움을 호소하는 여성을 향해 '너네 아파트 우체통 몇 혼지(는) 모르고, (그냥) 랜덤으로 넣어둘게''오늘의 미션 우체통을 찾아라''서버가 열리고 있습니다. 정신 못 차리네 오늘. 아무리 봐도'라고 했다. A씨는 법의 심판을 받는 것도 두렵지 않은 듯했다. 그는 '자폭이여 그래서 이거 누르는 순간 자살할거야 경찰이 오기도 전에''불법 도박사이트 운영 방식 모르냐'고 말했다. 그렇게 여성은 2년 넘게 경찰과 유관기관에 신고하기는커녕 가족에게도 말 못 하고 속앓이를 하며, A씨에게 끌려다닌 채 원치 않는 만남을 이어갔다.

협박과 조롱 등 '인격살인'이 극단적 선택까지 종용

여성이 삶의 끈을 놓아버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숨진 그날 새벽에 있었다. 새벽 3시, 여성은 A씨 여동생에게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하아 씨X 오빠 자살시도해서 지금 뼈랑 장기랑 많이 부서진 거 같아요. 언니가 무슨 짓 했어요?' '씨X 8층에서 떨어졌다는데 미친X 아냐'라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여성이 문자 발신자와 A씨에게 연락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한강 다리 위에서 시도한 통화도 A씨를 향한 연락이었다. 여성은 결국 진실을 알지 못한 채 떠나야 했지만, 그 메시지는 A씨가 자신의 여동생을 가장해 보낸 문자였다.

A씨는 경찰 조사에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경찰은 A씨의 휴대폰과 외장하드 등을 압수수색했지만 그가 말한 불법 촬영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A씨 역시 '촬영물은 실제로 없다'고 경찰에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그동안 보낸 수많은 문자 등을 '장난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경찰은 A씨의 행동이 여성 사망과 직접적 인과관계가 없다고 판단해 협박 혐의만 적용해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검찰, 고인 조롱 피의자 엄벌 위해 스토킹법으로 구속

유족들은 분노했다. '장난이었다'는 말에 화가 치밀었다.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중앙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2부(부장 김봉준)는 △포렌식 자료 △송·수신 메시지 △폐쇄회로(CC)TV 등을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자살방조 △위계자살결의 등 협박 이외에 추가로 적용할 혐의가 있는지 따져보기로 한 것이다.

검찰은 A씨의 증거인멸 정황에 주목했다. 수사를 담당한 이한종 검사는 A씨가 여성이 사망한 직후 메신저방을 나간 이유 등을 추궁했다. 여러 정황 증거들을 제시하자, 마침내 '장난이 아닌 협박'이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이 검사가 청구한 구속영장 청구서에는 협박 이외에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가 추가로 적시됐다. A씨의 지속·반복적 메신저 내용은 여성이 두려움을 느끼기엔 충분했고, 사실상 인격살인에 해당한다는 게 이 검사 판단이었다.

법원은 지난달 22일 A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구속 전 피의자심문에 참석한 피해 여성의 언니는 눈물을 흘리며 "A씨 때문에 동생이 고통을 많이 받았다"고 호소했다. A씨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검찰은 A씨가 2년 넘게 보낸 메시지가 '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된 2021년 10월 21일 이후에도 20회나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지난달 29일 A씨를 구속기소했다.

김영훈 기자 hu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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