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희 칼럼] 사기꾼은 활개치는데 법과 국가는 여전히 멀다
‘강원도판 대장동’ 꿈꾸다
뒤늦게 구속기소
경제범죄에 관대한 사회
사기범은 대담해지고
피해자가 ‘사기 당한 죄’ 감당
자동차로 3시간 거리, 280㎞나 떨어진 인천 미추홀구와 강원도 동해시 망상지구가 한 건설업자로 인해 황당한 인연에 엮였다.
지난 5일 인천지방법원. 미추홀구 전세 사기의 첫 재판이 열렸다.일명 '건축왕' 남모씨가 세입자 161명으로부터 전세보증금 125억원을 편취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하지만 이는 남씨가 세입자들에게 입힌 피해의 극히 일부다. 세입자가 보증금을 못 돌려받은 채 경매에 넘어간 집이 2월까지 690채, 경매 대기까지 합하면 2000채가 넘는다.
남씨는 그 일대에 빌라와 아파트를 짓고 2700채 넘게 실소유해 ‘건축왕’으로 불린다. 건설업자가 집 지어 팔아서 차익을 남기거나, 세 놓는 것은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남씨는 금융기관 돈으로 집 짓고 그 집을 세입자 돈 빼는 현금인출기로 활용한 것처럼 보인다. ‘빚더미 건설’로 대출과 전세 보증금을 합한 빚 규모가 5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드러났다. ‘깡통 전세’인데도 남씨에게 고용된 부동산중개사들은 집값을 부풀려 전세 거래를 유도했다. 은행 빚을 잘 갚는 것처럼 통장을 보여주면서 세입자를 안심시켰고, 집주인이 전세보증금을 못 주면 대신 갚아주겠다는 가짜 이행각서까지 써줬다. 한 세입자는 A집에 전세 살다 B집으로 이사 갔고 집 주인도 달랐는데 알고 보니 모두 남씨 소유였다. C집의 부동산중개인이 D집에는 바지 집주인으로 둔갑했다. 공범으로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9명이지만 전체 조력자는 50명이 넘는다. 전셋값 급등에, 싼 전세를 찾아들어간 곳에서 세입자들은 덫에 걸린 신세였다.
인천에서 갈고 닦은 사업 수완으로 남씨는 강원도 동해시로 진출했다. 최문순 전 강원도지사가 공약으로 추진한 동해시 망상지구 개발계획이 무산 위기에 처하자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2017년 동해이씨티라는 특수목적법인을 세우고 그 일대 땅을 경매로 사들인 뒤 2018년 11월 망상1지구 개발사업자로 선정됐다. 지역사회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회사에, 자금력과 개발 능력도 미덥지 않다고 우려했다. 인구 9만명의 동해시에, 아파트를 9000채 넘게 짓겠다는 계획에도 의구심을 나타냈다. 빈집이 넘쳐나는데 아파트를 왕창 짓는 건 지역 경제 회생에 도움되는 개발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기도 성남에서 ‘대장동 사태’가 터지자 급기야 ‘강원도판 대장동’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하지만 강원도는 문제가 없다고 밀어붙였고, 남씨 측도 ‘대장동 비유는 터무니없다’며 버럭 했다.
남씨의 ‘빚더미 개발’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한 건 인천 전세 사기 피해가 속출하고 한 차례 구속영장이 기각된 후 뒤늦게 구속기소되면서다. 동해 망상1지구 사업도 제동이 걸렸다. 남씨가 ‘효율적 타인 자본 조달’ 운운하며 망상1지구를 개발하겠다던 돈의 일부는 인천 세입자들의 피눈물 나는 전세보증금이었다는 정황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건축왕, 빌라왕까지는 아니어도 전세 사기가 만연해 인터넷에는 전세금 떼먹은 나쁜 임대인 얼굴 공개 사이트까지 생겼다. 피해자들은 “사기꾼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경찰도 검찰도 아니고 얼굴 공개다. 그래야 다시는 사기를 못 칠 것 아니냐”고 하소연한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사기 공화국’이 되어간다. 전체 범죄(2021년 153만건)는 10년 새 21.9% 줄었는데 사기 범죄는 22.6% 늘었다. 2021년 한 해 29만8000건으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교통범죄(34만건) 다음으로 빈번하다.
조직적 전세 사기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악덕 범죄’라며 과감한 대응을 지시했지만 피해자들에게 법과 국가의 보호는 여전히 멀다. 피해자 구제도 더디다.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전세대출금을 못 갚아 신용불량자가 되는 피해자가 속출한다. 그러는 사이, ‘건축왕’ 남씨 소유 집에서 30대 세입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비극까지 벌어졌다. 7000만원 전세금이 최우선 변제 기준보다 500만원 많다고 최우선 변제의 적용도 못 받고 빈손으로 쫓겨나게 된 고인은 삶의 마지막 끈을 놓아버렸는데, 5000억원이나 되는 빚으로 피해자를 양산하고도 남씨는 법정에서 “사실관계는 인정하는데 법리상 사기는 아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재판을 지켜보던 전세 피해자들은 또 한번 무너져 내렸다. 다중의 삶을 망가뜨린 경제 범죄가 미국이라면 100년 넘는 형벌에도 처해질 것이다. 하지만 경제 범죄에 관대한 사회에서 가해자는 당당하고, 피해자들만 혹독하게 ‘사기당한 죗값’을 치르고 있다.
정부도, 국회도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더 빨리, 더 전향적으로 피해자 구제에 나서야 할 것 같다. 조직적 전세 사기를 계기로, 소시민의 삶을 무너뜨리는 파렴치한 경제 범죄 연루자는 엄하게 처벌하도록 법 관행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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