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다양한 가족 인정해야 저출생 극복
아이가 학교에서 받아 온 종이에 ‘학부모 동의서’라는 글씨가 제목으로 큼지막이 써 있었다. 사건을 통해 만난 아이들 중 ‘학부모’라는 단어에 심리적으로 위축되지 않을 만한 아이를 떠올려봤지만 별로 없었다. 한부모가정이거나 조손가정, 나이만 어리지 사실상 가장인 아이, 시설에 살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들의 다양한 삶을 담기에 ‘학부모’라는 단어는 참 좁은 것 같았다. 그래서 아동복지법의 용어인 ‘보호자’라는 말로 바꾸자고 학교에 정식으로 건의했다.
아무리 자기 표현이 자유로운 시대라 하더라도 표정이나 평가, 분위기에 알게 모르게 마음이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와 다른 수많은 타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인간으로서의 생존본능일지도 모른다.
아이를 낳는 일도 마찬가지다. 낳고 기르기가 벅차거나 주변 손가락질이 두려우면 아이를 낳는 선택은 가급적 안 하게 된다.
2022년 대한민국의 합계출산율은 0.78명이다. 내전 상황보다 더 낮은 출생률이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이다. 아래에서 두 번째인 이탈리아가 1.24명이기에 대한민국의 합계출산율은 명실상부 최하위라고 할 수 있다. 이대로 가면 2050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0% 안팎이 될 것이라는 관측, 2070년에는 노인 부양을 위해 국민이 버는 돈의 42%가 국민연금 보험료에 들어가야 한다는 관측도 나왔다.
저출생 사회의 원인으로 치열한 경쟁, 살벌한 집값과 교육비, 높은 수도권 밀집도, 심해지는 양극화와 그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 등이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은 직접적으로는 결혼제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2021년 여성가족부의 가족다양성에 대한 국민인식조사에서 ‘사실혼, 비혼동거 등 법률혼 이외의 혼인에 대한 차별을 폐지해야 한다’고 답변한 국민은 80%에 가까웠다. 2022년 통계청 사회조사 보고서를 보면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이렇게 변화하는 사람들의 인식에 비하여 아직도 대한민국 민법은 가족을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직계혈족의 배우자’로만 규정하고 있다. 친밀하게 오랜 기간 동거하며 지냈더라도 법적 혼인관계가 아니면 배우자로 인정되지 않으며, 학대나 폭력으로 엉망인 원가정에서 독립하여 새롭게 꾸린 친밀한 공동체가 있더라도 가족으로 용인되지 않는다. 혼인이나 혈연관계가 없는 생활공동체를 위한 상속이나 세금 감면은 물론 안 되고, 수술동의서에 서명할 수도 없고 장례를 치를 수도 없다.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는 사회보장제도 혜택에서 동거 커플과 법적 부부를 같게 취급하고 있다. 다양한 생활공동체를 가족으로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는 출생률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는 아이가 자라나는 데 꼭 필요한 복지제도인 가족수당, 무상 보육·교육 등을 결혼 여부나 가정의 형태에 상관없이 똑같이 제공한다. 키우는 어른이 아니라 태어난 아이를 중심으로 제도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출생률 하락을 면치 못하던 프랑스의 합계출산율은 2020년 기준 1.8명으로 유럽 최고 수준이 되었다. 그해 프랑스 비혼 출산 비율은 62.2%였다.
혼외자의 비율을 높여서라도 저출생 문제를 기능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태어나는 아이라 하더라도 똑같이 존중받으며 자랄 수 있는 사회여야 아이를 낳을 마음을 먹을 수 있다.
어느 집에서 태어날지 미리 정할 수도 없는 아이가 법률혼 중심의 정상 가정 프레임 아래서 부당한 차별을 겪지 않도록, 다양한 관계를 법적으로 수용하고 지원하는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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