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인생을 펼쳐서 보여줄 수 있다면

기자 2023. 4. 10.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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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문장에는 빈칸이 있다. ‘나의 ○○○ 이야기’. 당신이라면 무엇을 채워 넣을까? 빈칸에 들어갈 단어의 조건은 이렇다. ‘끔찍이 싫었지만 끌어안은 것. 나를 나로 만든 내 인생의 한가운데.’ 이것은 출판사 후마니타스에서 제작한 ‘나의 ○○○’ 시리즈 설명 중 일부다. 곱씹을수록 위 두 문장이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 싫어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인 까다로운 일들이 모두의 삶에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진실을 길어올리게 되는 빈칸. 그곳에 ‘이동권’을 채워넣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어떤 인생은 이동권이라는 말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동이 딱히 시련이었던 적 없는 자는 죽을 때까지 모를 일들을 그 사람은 안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헤엄출판사 대표

‘나의 이동권 이야기’를 시작한 그의 이름은 이규식이다. 어린 시절 규식은 제비가 집 짓는 과정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자랐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중증 뇌병변 장애인으로 태어난 그를 시골집에 남겨두고 날마다 일하러 나갔다. 활동보조 같은 개념은 아무도 알지 못했던 시절이라 가족들도 별다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걸을 수 없는 규식은 어디에도 가지 못한 채 누워서 천장을 봤다가 마루로 기어나가 하늘을 보고 새들을 보고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보았다. 그렇게 방구석에서 유년기가 흘러갔다. 청년기에는 무려 10년을 시설에 갇혀 살았다. 장애인들을 따로 격리하는 그곳에선 보호와 학대와 억압이 분리되지 않기도 했다. 서른 살이 되도록 규식은 운동이 뭔지 몰랐다. 농구나 배구 같은 것을 떠올릴 뿐이었다. ‘장애 운동’이라는 말을 들으면 장애인이 무슨 운동을 하나 싶었다.

추락하며 시작된 ‘제2의 인생’

1999년 어느 날 규식은 대학로로 향한다. 친구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돌아오는 길엔 승강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해야 했다. 계단은 이용할 수 없고 엘리베이터는 올라오는 방향에만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탈 때마다 요란한 효과음이 나서 수치스러워지는 열악한 휠체어 리프트에서, 그날 규식은 추락 사고를 당한다. 리프트의 안전장치가 너무나 허술했던 탓이다. 계단에 머리와 온몸을 부딪히며 떨어진 그는 병원에 실려간다. 죽을 뻔한 사고였다. 규식이 입원해 있는 동안 규식의 친구들이 들고일어났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자고 이들이 싸워준 덕분에 혜화역에는 전국 최초로 양방향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 장애인이 안전하게 오르내릴 수 있는 최초의 역내 엘리베이터와, 혜화역 2번 출구 바닥에 새겨진 이동권 투쟁의 동판은 규식과 친구들이 일궈낸 것들이다. 그들은 한국 장애인 인권 운동의 새 역사를 쓴다. 또 다른 지하철역에서 리프트를 타다가 추락사한 장애인들, 버스도 지하철도 택시도 마음대로 탈 수 없는 장애인들, 시설에 갇힌 장애인들, 시설에서 나와도 자립하기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해 규식은 마치 몽골의 걸출한 장수처럼 움직였다. 소설 <파친코>의 유명한 첫 문장은 규식의 삶에도 내레이션으로 흐를 수 있을 것이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역사가 우릴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규식 또한 역사의 큰 물줄기를 몇 개나 가로막았으므로. 가로막는다는 동사는 그의 삶을 관통한다. 시대와 법과 공권력과 대중교통이 그를 가로막자, 규식은 버스와 지하철 앞에 드러누웠다. 버스의 가장 깊숙한 밑바닥으로 기어들어가 몇 시간을 버티기도 했다.

너의 해방이 곧 나의 해방이다

이동권 시위를 두고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싸우는 거냐고 묻는 이들에게 규식의 인생을 펼쳐서 보여주고 싶다. 모든 문과 계단과 작은 턱 앞에서 삶이 유예되는 장면을 그들 마음속에 그려주고 싶다. 나는 그것이 바로 책이라는 사실에 뭉클해지고 만다. 책은 그야말로 누군가의 인생을 펼쳐서 보여주는 직육면체다. 그가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지하철 선전전에 나가면서도 남은 힘을 끌어모아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를 집필한 심정을 알겠다. 이 책은 그의 동지들이 함께 쓴 작품이다. 언어장애가 있는 규식의 길고 긴 이야기를 김소영, 김형진, 배경내가 전부 듣고 옮겨 적었다. 장애인에 관한 비장애인의 부족한 리터러시를 세 명의 작가가 메꾼 것이다.

비장하고 처절하기만 할 것 같은 투쟁의 현장에는 언제나 우스꽝스럽고 사랑스러운 일들도 함께 일어난다. 규식의 책에서 나는 투쟁의 여러 구석을 본다. 투쟁이 이토록 눈물겹다니. 투쟁이 이토록 웃기다니. 투쟁이 이토록 사랑과 우정이라니…. 사는 내내 부당한 이유로 사법 처리 중이었던 규식의 생애는 우리에게 일러준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싸움을 피할 수 없을 때 어떻게 뭉치고 흩어져야 하는지. 너의 해방이 어째서 곧 나의 해방인지. 이들 덕분에 겨우 진보해온 이동권의 역사를, 지하철에 오르내릴 때마다 생각한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헤엄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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