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숙제는 즐거워
딸아이가 주말에 가족들과 벚꽃 구경하기가 숙제라고 한다. 토요일이라 느지막하게 일어나 동네 개울가로 나섰다. 아이는 물에 발 담그고 놀 거라고 신이 났지만 수건을 들고 따라가는 엄마의 마음은 귀찮기만 하다. 아이는 걸어가는 내내 재잘댄다. “엄마, 너무 예뻐.” “엄마, 꽃비가 내리고 있어.” 개울가에 발을 담그니 시원하다.
딸은 개울물에 떠내려오는 벚꽃 잎을 잡는 놀이를 시작했다. 졸졸 곱게 무리를 지어 떠내려오는 꽃잎을 줍느라 정신이 팔렸다. 옆에 자리 잡은 쌍둥이들이 우리 딸이 곱게 모아 둔 꽃잎들이 예뻐 보였는지 계속 훔쳐 간다. 쌍둥이 도둑단이 꽃잎을 들고 가다 눈이 마주쳤다. “으하하”라고 활짝 웃으며 도망가는데, 귀엽다. 같이 웃는 동안 무거운 숙제가 가벼운 웃음으로 바뀌었다.
지난달 숙제는 지구를 위한 ‘어스 아워(Earth Hour)’로 1시간 동안 불 끄기를 해야 했다. 초등학교 바로 옆 아파트라, 8시 30분이 되자 건너편 동에 불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한다. 중학생인 아들도 동참했다. 불을 끄고 할 일이 없어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숙제를 하려는 모범 초등생과 달리 중학생은 마음이 널뛰기라 금방 지루하다며 방에 가서 불을 켰다. 오빠 때문에 숙제를 제대로 못 한다며 둘째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달래느라 캠프파이어를 하자고 집에 있던 향초를 켜고 둘러앉았다. 촛불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진다. 갑자기 중2 아들도 궁금했는지 나와서 같이 앉아 이른바 ‘불멍’을 했다. 길 것 같은 한 시간이 훅 갔다. 소등하며 지구도 보호하고, 덕분에 가족끼리 의외의 시간을 보냈다.
학창 시절엔 그리도 하기 싫었던 숙제인데, 막상 숙제 덕분에 여러 가지를 깨닫게 된다. 숙제(宿題)에는 해야 할 과제(課題)라는 뜻도 있지만, ‘두고 생각해 보거나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뜻도 있다. 숙제가 아니었다면 바쁜 회사 일에 치여서 봄꽃 보는 일도 놓쳤을 것 같다. 한창 시끄럽고 밝을 토요일 밤 8시에 고요하게 불을 끄고 거실에서 캠프파이어를 할 생각도 못 했겠지. 적절한 숙제 덕에 삶을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이번 주에는 또 어떤 숙제가 나올까. 학생들보다 부모들에게 더 좋은 숙제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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