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 무대 지킨 뚝심…“아내가 ‘수고했수, 이제야 이루셨네’ 하더군요”

이태훈 기자 2023. 4. 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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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이해랑연극상 배우 김재건

“제가 무슨 철학자라고.”

히틀러처럼 무서워 별명이 ‘임틀’이었던 연출가 임영웅 선생이 차갑게 말했다. 1972년, 국립극단 연기인 양성소 5기로 들어간 20대 초반 연극배우 김재건(76)이 이제야 제대로 무대에 발을 디디려던 때. 연극 ‘임종자의 손’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공연을 앞두고 임 선생은 국립극단 예비 배우들에게 작품 주제에 대해 써오라는 숙제를 냈다. 동기생 배우 심양홍은 원고지 15장을 썼고 20장 넘게 쓴 동료도 있었는데, 김재건은 딱 석 줄을 써냈다가 임 선생에게 ‘찍힌’ 것이다. “전부 배역이 있는데 나는 안 주시더라고. 무대도 못 올라가는 이름 없는 역할에 대사가 ‘공장 부감(副監) 납신다!’ 딱 한 줄이었어요. 큰일이다 싶었지. 이걸 어떻게 이겨내야 하나.”

54년 무대 위를 달려왔다. 올해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인 김재건 배우가 연극 ‘만선(滿船)’을 공연한 서울 명동예술극장 앞에서 달리는 포즈를 취해 보였다. 그는 “내가 코미디도 잘한다. 아주 냉철한 역할부터 따뜻하고 품 넓은 역할까지 다 어울린다더라”며 웃었다. /남강호 기자

아침 운동 때 늘 하던 발성 연습에 배로 집중해 성량을 더 키웠다. 마이크 없이 목소리로만 대극장 맨 끝줄 관객에게까지 대사를 전달하던 시절, 김재건은 연습 때마다 ‘공장 부감 납신다~’ 그 한 줄에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다. 막 오르기 20일 전쯤 임 선생이 마침내 ‘저 목소리 누구냐’ 물었다. 작은 배역이 하나 주어졌고, 곧 좀 더 대사가 많은 역할로 올라섰다. 오로지 노력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최근 서울 명동예술극장 분장실에서 연극 ‘만선(滿船·9일 종연)’에 출연 중이던 배우 김재건을 만났다. 김재건은 서울예대를 나온 뒤 1970년 동랑 레퍼토리 극단 단원으로 시작, 햇수로 54년째 무대를 지키고 있다. 1973년 정식 단원이 된 국립극단에선 2010년까지 100편 넘는 거의 모든 작품 무대에 오른 단골 주연배우였다.

꾸준함과 성실성의 비결을 묻자, 그는 “나는 남보다 잘하는 게 없어서 무조건 남보다 두 배 이상 공을 들였다. 평생 그걸 잊지 않았다”며 웃었다. “나는 행운아 같아요. 솔직히 딴생각할 틈도 없었어요. 1년에 한 편 못 하는 배우도 있는데 나는 국립극단 나와서도 매년 네 편은 했거든.”

백상예술대상, 히서연극상, 평론가협회 최우수연기상 등 상도 골고루 받았지만 이해랑연극상은 그에게 하나의 정점(頂點)이다. 김재건은 “1970년 이동극장 단원으로 이해랑 선생께 배우며 활동했다”며 “큰소리 한 번 없이 자상하고 차분했지만, 자신의 호흡을 못 따라오면 공연 코앞이어도 가차 없이 배역을 바꾸는 강단이 대단한 분이었다”고 했다. “산길 버스 사고로 황천길 갈 뻔도 하고, 무대에서 연기하다 망치에 잘못 맞아 머리가 깨지기도 했어요. 길도 제대로 없던 시절, 이동 극단 공연 버스가 자정 넘어 도착해도 시골 사람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기다리다 환호하면 힘든 줄도 모르고 연극을 했죠.”

김재건은 “이해랑연극상은 꼭 받고 싶었다. 세월은 가고 자꾸 후배들이 받길래 인연이 아닌가 싶었는데, 배우 길 열어주신 이해랑 선생이 드디어 만선(滿船)으로 가득 채워주신 것 같다”고 했다. 수상 소식을 전하자, 피아노 한 대로 하루 스무 명씩 학생들을 가르치며 내조한 아내가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축하해 줬다. “수고했수. 이제야 이루셨군요, 하더군요.”

임영웅이 “프릴 달린 셔츠가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라고 했던 젊은 시절엔 극단 산울림의 ‘꽃피는 체리’(1977) 등에서 철없는 도련님 분위기의 꽃미남 역할도 자주 맡았다. 국립극단이 프랑스 연출가를 초빙해 ‘돈 주앙’(1982)을 무대에 올릴 때 주연 돈 주앙 역할을 맡은 것도 그였다.

그의 연기는 연륜을 더할수록 깊어지고 폭 넓어졌다. 백상예술대상을 받은 ‘사로잡힌 영혼’(1991) 에선 종횡무진 무대를 휘어잡는 해학을 보여줬고, 죽음이 즐비한 ‘태(胎·1997)’의 무대 위에선 조카 단종 앞에서 잔혹한 폭군 세조가 돼 소름 끼치는 카리스마를 선보였다. 그는 “이만희 작가의 ‘피고지고 피고지고’ 대구 공연 땐 막이 내리자 여고생 40여 명이 사인을 받겠다고 줄을 서기도 했다”며 웃었다.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면 40여 분간 독일 연출가에게 배운 방식에 따라 연극을 위한 몸 상태를 만드는 스트레칭을 한다. 하루 1만 보 걷기도 빠뜨린 날이 없다. “김재건은 지금까지 늘 맡겨주면 후회 없을 배우였어요.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이해랑연극상 수상으로 매듭이 또 하나 지어졌다. 이제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은가 묻자, 팔순을 바라보는 이 노배우는 “귀여운 배우로 남고 싶다”며 껄껄 웃었다. “올 초 국립극장에서 연극 할 때였어요. 교복 입은 여학생들이 지나가면서 ‘저기 그 할아버지 지나간다. 너무 귀여우셔’ 하더라고. 평생 연극에 가장 중요한 건 관객이라고 믿었어요. 그 관객과 소통 잘되는 ‘귀여운 배우’로 기억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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