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국의 아포리아]역사에서 '구조적 부정의'의 함정
[편집자주] 아포리아는 그리스어의 부정 접두사 아(α)와 길을 뜻하는 포리아(ποροσ)가 합쳐져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 또는 증거와 반증이 동시에 존재하여 진실을 규명하기 어려운 난제를 뜻하는 용어. '김남국의 아포리아'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에 대해 지구적 맥락과 역사적 흐름을 고려한 성찰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대안을 모색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비극적인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유대인들은 찌르면 피가 나지 않는가? 우리라고 간지럽히면 웃지 않는가? 독을 먹이면 죽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에게 복수하지 않겠는가"라고 외친다. 그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적에 대한 복수의 열망과 분노의 감정은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동기들 가운데 가장 강렬한 요소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동기를 4가지 차원으로 구분하면서 공동체의 선을 고양하려는 공적이고 이성적인 동기를 가장 높이 평가했고 그 다음 적에 대한 복수의 열망과 분노의 감정이 있다고 봤다. 세 번째는 당연하게 얻거나 되찾아야 한다고 믿는 이익에 근거한 동기가 존재하고 가장 낮은 정의구현의 동기로 질투가 있다고 생각했다. 공동선의 고양과 복수에 대한 열망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정체성'(identity)의 핵심을 이루고 이익과 질투는 '이해'(interest)로 묶일 수 있다.
우리 안에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이런 위계질서 때문에 사람들은 자주 이해의 동기를 정체성의 동기인 것처럼 감추고자 한다. 그러니까 큰 이익이 눈앞에 있다면서 복수에 대한 열망을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예컨대 한일관계에서 제3자 변제와 같은 정치적 결단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정체성의 핵심과 관련된 이런 사안은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위한 토론이 필요하고 우리 대법원 판결에 따른 교착상황을 해결하려는 대안일 뿐 추가적인 역사적 정의논의와는 별개라며 선을 그어야 한다.
제3자 변제라는 해법에 이르는 과정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는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적 접근에 대한 비판과 구조적 부정의(structural injustice)에 대한 강조다. 즉 가해자의 사과와 피해자 배상이 문제해결의 전부가 아니고 식민지 시대에 우리 사회가 처한 구조적 부정의를 동시에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과 조선이 전쟁을 통해 병합됐던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나 우리가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대비하지 못해 식민지 상황에 이르렀다는 주장도 가해자의 책임에 대한 추궁보다 제국주의 시대의 구조적 질서와 우리 자신을 탓한다.
구조적 부정의를 강조하는 입장은 위안부 문제의 경우 계획입안자(plan maker)와 계획실행자(plan taker)를 나누고 일본군부와 일본국가가 계획을 세웠다면 조선 식민정부의 관료와 경찰, 지역유지, 민간사업자들이 그 계획을 집행하는데 중요하게 기여했다고 본다. 즉 일본군의 광범위한 강제납치보다 식민지 현지에서 계획실행자들의 협조 아래 위안부 모집이 진행됐고 식민지 조선사회의 가부장적, 계급적 모순이 이런 협조를 가능하게 만들면서 제국주의 시대의 구조적 부정의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실제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개최된 유엔 주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세계회의'에서 세네갈의 압둘라예 와데 대통령은 과거 노예무역에 따른 흑인들의 피해에 대해 아프리카 국가들이 영국이나 미국에 배상을 요구하는 것에 반대했다. 자신의 선조를 포함해 현지의 추장이나 왕들의 협조 아래 노예무역이 진행됐고 당시 노예제는 세계적 현상이었는데 이제 와서 아프리카의 과오에 대한 반성 없이 일방적으로 배상을 요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구조적 부정의 논의는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지만 결국 피해자 대부분을 비인도적 식민지배의 공범으로 만들면서 역사적 정의를 구현하려는 공동선의 고양과 복수심을 덧없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가해자의 역할과 책임은 사라진다. 이른바 기억의 전쟁에서 가해자는 자신의 잔학한 행위들을 덮거나 왜곡하면서 끊임없이 역사를 새로 쓰려고 시도해왔다. 어떤 구조 아래 있었다는 사실이 행위자의 역사적 책임을 면해줄 수는 없다. 여전히 피해의 내용을 밝히고 누가 가해자인가를 분명히 하고 사과와 배상을 받는 것이 역사적 정의구현의 첫발인 것이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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