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기밀문서 유출, 韓·이스라엘 도청 정황도… “러시아가 흘렸을 수도”

워싱턴/김진명 특파원 2023. 4. 9.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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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에 문건 사진 100장 노출
한국 국가안보회의 내용도 있어

최근 온라인에 유출된 미국 기밀 문서에서 미국이 한국 국가안보실장 주재 회의를 도청한 듯한 정황이 드러났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6일(현지 시각) “미 국방부가 온라인 채팅 플랫폼 디스코드 및 보안 메신저 텔레그램 등을 통해 미 정보 당국이 작성한 기밀 문건이 대거 유출된 사실을 이달 초 파악했다. 이에 대해 법무부와 연방수사국(FBI)에 수사를 의뢰했다”고 전했다. 유출된 문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전황을 분석한 정보 문건이 대부분인데, 일부 문건엔 한국·이스라엘 등 우방의 정부를 감청한 내용이 적혔다고 알려졌다.

미국 버지니아주(州) 알링턴에 위치한 미 국방부 청사 펜타곤의 전경. 미 국방부는 6일(현지 시각) 온라인 채팅 플랫폼 디스코드 등을 통해 미 정보 당국의 기밀 문건이 대거 유출된 사실을 이달 초 파악해, 법무부와 연방수사국(FBI)에 수사를 의뢰했다고 밝혔다. /미 국방부

8일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유출된 기밀 문건 중 하나엔 지난 3월 초 한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논의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줄 포탄을 제공해 달라는 미국 요청을 받고 러시아를 과도하게 자극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대응할지를 두고 “고심했다”는 것이다. 문서는 “한국의 국가안보실장은 미국의 목표가 우크라이나에 빨리 포탄을 주는 것인 만큼, 주요 무기 공급 통로를 통제하고 있는 폴란드에 포탄을 판매할 가능성을 제안했다”는 내용 등을 담았다고 WP는 전했다.

한국 정부는 9일 “공개된 내용이 종전 입장과 다르지 않으며 미국 측과 필요한 협의를 하겠다”고 원칙적 입장을 밝혔다.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할 포탄을 한국에 요청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내용이다.

유출된 기밀 문건 중 한국을 언급한 문서는 그 출처를 ‘신호 정보(signals intelligence)’라고 밝히고 있다고 WP는 전했다. ‘신호 정보’란 통신 감청이나 레이더 또는 전자 기기의 신호를 포착해 얻는 정보를 일컫는 첩보 용어다. 시긴트(SIGINT·통신 정보)라고도 부른다. 이를 인용해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것은 미국이 김성한 당시 국가안보실장 주재 회의를 도청했거나, 이 회의 내용을 언급하는 다른 정부 당국자들의 통신을 가로챘다는 뜻이 된다.

NYT는 이날 “소셜미디어 등에 유출된 정보는 미국 정보 당국이 중요한 동맹들까지 도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한국 사례를 들었다. “살상 무기 지원을 금하는 정책을 어기고 우크라이나에서 쓸 포탄을 미국에 제공해야 할지 여부를 두고 한국 내부에서 이뤄진 토론에 대한 내용이 최소한 두 번 언급됐다”고도 전했다. 이 문건의 한 대목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에 대한 포탄 제공을 압박할까 봐 한국 당국자들이 우려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

유출된 또 다른 문서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탄약, 포탄 등 무기 고갈로 고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을 포함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속적인 무기 지원’에 애쓰면서, 미국이 한국에까지 포탄 지원을 요청하는 이유다. 영국에 이어 독일과 미국이 지난 1월 우크라이나에 주력 전차 지원을 연달아 결정하자, 폴란드 등 독일산 전차를 보유한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에 잇따라 나서왔다.

우크라이나 군인이 지난 8일 우크라이나 도네스크에서 러시아군을 향해 로켓포를 발사하는 모습. 최근 유출된 미 정보당국의 기밀문서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은 포탄 등이 고갈될 우려가 있어 서방 국가에 지원을 요청해야 할 상황으로 알려졌다. /AP 연합뉴스

한국은 러시아와 맺은 관계 때문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 무기 지원에는 나서지 못하는 실정이다. 러시아엔 현재 한국 기업 160여곳이 법인을 두고 있고 현대차그룹과 LG전자, 삼성전자와 팔도 등 국내 기업들이 대규모 공장을 갖추고 있다. 이들이 러시아에 보유한 자산만 수조원어치다. 서방의 대러 제재로 현지 생산은 물론 러시아 수출길도 막히면서 이 기업들은 많게는 수천억원의 손실을 입었다고 알려졌다. 러시아와 관계가 파탄 날 경우 현지 진출 기업들이 상당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한국은 고육지책으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고 나면, 그 재고를 채워주는 방식으로 ‘밀어내기’식 간접적 무기 지원을 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지난해 우크라이나에 100만발이 넘는 155㎜ 포탄을 지원한 뒤, 한국에서 10만발을 사 간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은 또 폴란드에 K9 자주포와 K2 흑표 탱크, FA50 전투기도 수출 중이다. 이 한국 무기들은 폴란드가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크라프 자주포, T72 탱크, 미그29 전투기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동맹국 혹은 제3국에 대한 무기 판매이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적 무기 지원이 아니라는 것이 한국 정부 입장이며 유출된 문서 내용도 이런 정황과 일치한다.

문서를 유출한 주체나 진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한편에선 미국이 우방을 감청했다는 정보를 흘려 자유 진영을 이간질하려는 러시아 측의 조작 가능성이 제기된다. 우크라이나전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대 러시아의 ‘권위주의’ 대립으로 번지는 가운데 러시아 세력이 ‘미국이 한국을 감청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밀 문서를 흘려 자유주의 진영을 분열시키려 시도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NYT는 “유출된 문서를 주로 유통한 온라인 채널 중에 친(親)러시아 성향이 많다는 사실을 들어, 러시아가 선택적으로 문서를 위조해 허위 정보를 역(逆)으로 흘렸을 수 있다는 군사 전문가들의 경고가 나온다”고 전했다.

러시아는 2016년 미 대선 당시 친러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소셜미디어에 상대인 힐러리 클린턴에게 불리한 허위 정보를 대거 흘리며 여론전을 폈다. 이번에 유출된 문서엔 미 정부가 이스라엘 정부 및 정보기관 ‘모사드’를 감청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는데, 이 또한 우방인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시도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러시아 문제 연구소인 CNA의 마이클 코프먼 소장은 NYT에 “러시아를 통해 나온 정보는 사실 여부를 떠나 매우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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