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스위스 은행의 추락
스위스 비밀금융주의 시험대
중립국 설 땅 갈수록 없어져
스위스 위기 반면교사 삼아
국내 금융기관도 '평판' 관리를
스위스 2위 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가 1위 UBS에 강제 매각된 지 3주가 흘렀지만 스위스인들의 충격과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167년 역사를 지닌 스위스의 상징이 미국에서 불어온 은행 위기에 일주일 만에 몰락했다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다. 티에리 부르카르트 스위스 자유민주당 대표는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단지 일개 기업이 아니라 스위스 정체성의 일부분이었다"며 "스위스 평판에도 심각한 대미지를 안겼다"고 평가했다.
알프스산맥을 굽이굽이 도는 열차처럼 CS는 스위스 경제 곳곳에 귀중한 혈액을 공급하던 존재였다. 그런 은행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CS만 쓰러진 것은 아닐 것이다. 스위스가 300년간 지켜온 은행 비밀주의도 시험대에 올랐다. 최대 주주인 사우디아라비아국립은행의 추가 지원 거부 소식에 뱅크런이 시작됐고, 모든 규정을 어겨가며 헐값에 매각됐다. UBS는 부실 규모도 파악하지 못한 채 CS를 떠안았다. 실사에 주어진 시간은 고작 48시간뿐. 스위스 당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확산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지만 속내는 '은행 비밀주의'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월가 금융기관인 블랙록도 인수를 위해 기웃거렸지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돈세탁의 온상' '검은돈의 천국'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는 스위스 금융시스템의 핵심은 '비밀주의'다. 예금자의 비밀을 철통처럼 보장해준다. 설사 그가 마약 딜러나 테러리스트라도 유대인 수백만 명을 죽인 나치 히틀러라도 예외는 없다. '검은돈'을 보장하는 것이 인구 900만명도 안 되는 유럽의 작은 나라를 먹여 살린다는 것을 일찍이 체감했는지 1934년에는 비밀주의를 법제화한다. 은행과 저축은행에 관한 연방법 제47항에는 "기관 구성원, 임무를 부여받은 담당직원, 채권 대리인 또는 은행 임원, 은행신용거래위원회의 감독관, 공인된 심사기관의 직원으로서 자신에게 위임되었거나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발설하는 자, 타인으로 하여금 직업상의 비밀을 누설하게 하는 자는 최대 6개월의 징역이나 최대 5만프랑의 벌금형에 처한다"고 쓰여 있다. 해당 직분이 끝나도 비밀 발설자는 처벌된다. 가히 스위스라는 나라의 최고법은 은행의 비밀보장이라 할 만하다.
1815년부터 채택한 중립주의도 은행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전쟁이나 대공황에도 '스위스는 안전하다'는 평판이 생겼고 이는 초갑부들의 자금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하지만 절대 해가 지지 않을 것 같았던 스위스 금융제국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재원 마련을 위해 "미국인의 예금거래 정보는 반드시 우리 당국에 통보해야 한다"는 내용의 법을 만들었다. 스위스를 겨냥한 법이었다. 이때부터 스위스 은행들의 예금고는 급감했고 줄어든 예금고를 보충하기 위해 스위스 은행들도 월가 투자은행처럼 고수익·고위험 투자상품에 뛰어들었다. CS의 몰락을 재촉했던 무분별한 투자도 이때 시작됐다.
세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두 진영으로 쪼개지고 있다. 서구 민주주의 진영과 러시아·중국을 비롯한 권위주의 체제다. 스위스는 애매한 중립국이라는 입장으로 양쪽에서 욕을 먹고 있다. 중립국 핀란드에 이어 스웨덴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을 희망하고 있다. 중간지대는 사라지고 있다. 스위스가 언제까지 중립국 지위를 유지할지 알 수 없다. 은행 비밀주의도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다. 스위스의 국부를 떠받치는 두 축이 위태롭다. 은행 위기는 스위스가 처한 딜레마를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에겐 새삼 평판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위기 한 번에 '안전의 대명사'였던 스위스 은행마저 초광속 뱅크런으로 쓰러지고 있다. 국내 금융기관도 평판 관리를 통해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
[이향휘 글로벌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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