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잔잔하게 스며드는 예술

이한나 기자(azure@mk.co.kr) 2023. 4. 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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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광주비엔날레 개막
광주비엔날레전시관에서 말레이시아 예술집단 팡록 슬랍이 5·18광주항쟁의 저항과 연대, 애도의 순간을 목판화로 표현한 작품 '광주 꽃피우다'를 관람객들이 감상하고 있다. 연합뉴스

해변가와 숲이 펼쳐진 가운데 흑인 여성이 영적인 기운을 끌어모으는 듯 느린 춤을 추고, 노랫소리 같은 흥얼거림이 들린다. 두 벽에 쏘이는 영상외에도 바닥 한가운데 물이 넘칠 듯 가득한 거대한 수조에 커다란 눈망울의 흑인 여성 얼굴이 왠지 낯설지 않다.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평화로운 기운이 번지는 느낌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영적 치유자 '상고마' 전수자인 작가 불레베즈웨 시와니(36)가 자연 속에 깃든 영적인 존재를 상상하며 구현한 설치 영상 '영혼강림' 장면이다. 수조에 담긴 차분하고 잔잔한 물결처럼 서서히 공감하고 치유하는 예술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광주비엔날레의 주제의식을 첫 번째 작가가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아시아 최대 현대미술 축제인 제14회 광주비엔날레가 7일 공식 개막해 오는 7월 9일까지 94일간 대장정에 들어갔다. 도덕경에서 유래한 주제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에 걸맞게 이질성과 모순을 수용하는 물의 속성이 전시장 전체에 차분하고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올해는 영국 테이트모던 큐레이터 출신 이숙경 예술감독의 기획력이 제대로 색깔을 드러냈다. 광주 정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거나 비엔날레 특유의 도발적이고 거친 작업을 앞세우기보다는 '광주, 한국, 아시아다운 것을 넘어 인류 다층의 이야기'를 풀어내 많은 이의 공감을 끌어내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이번 비엔날레에는 전 세계 79명(팀)의 작가들이 참여하는데 태어난 곳과 활동하는 지역이 다른 이주자가 대부분이다. 국적이 큰 의미 없어 별도로 구분하지 않았다. 특히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됐던, 호주와 미국 등 신대륙은 물론 아마존 우림 등의 원주민(선주민) 후예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저항과 해체, 탈식민주의, 생태, 환경 등 강력한 메시지를 연대와 사유, 포용, 회복으로 구현하려는 노력의 결과다.

역시나 지역민과 교류한 외국 작가들의 새로운 해석이 흥미로웠다. 멕시코 출신 알리자 니센바움은 5·18광주민주화운동 2년 뒤 설립된 놀이패 신명과 협업한 거대한 초상화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광주항쟁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을 위한 마당극 속 탈 쓴 배우들 초상이 우리 민중미술과는 또 다르게 표현됐다. 타렉 아투이는 2019년부터 4년간 광주의 악기장, 공예가들과 함께 협업해 전통 악기와 옹기 등의 제작법을 재해석한 '엘레멘탈 세트'를 선보였다. 일본 작가 고이즈미 메이로는 과거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정체성에 기여했던 고려극장을 추적해 만든 '삶의 극장' 영상을 현재 광주에 사는 고려인 청소년들과 함께 제작해 지역성을 넘어서는 보편적 연대의식으로 끌어올린다.

멕시코 작가 노에 마르티네스는 5일 도예 설치와 함께 제의를 치르는 퍼포먼스로 16세기 유럽에 노예로 팔려갔던 선조들의 역사를 환기하고 과거 상처를 치유하려고 했다. 한국의 판화 거장 오윤의 작업에서 영감을 얻은 말레이시아 예술집단 팡록 슬랍의 목판화가 함께 조응하는 전시도 관람객을 감동시킨다.

쉽게 체험할 수 있는 예술을 통해 대중과 접점을 넓히는 전시 방식도 탁월했다. '본다는 것'에 대해 탐구해온 한국 작가 엄정순은 시각장애 학생들과 함께 대형 코끼리 조각을 만들고 관람객이 시각장애인처럼 촉각, 후각으로 느끼도록 마음껏 만지게 했다. 이승택, 이건용, 김구림 등 한국 실험미술 거장들도 관객 체험형 작품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시각을 뛰어넘자 예술이 더 풍성해졌다. 광주 출신으로 유럽에서 활동하는 김민정의 아름다운 한지 회화와 광주 적산가옥 사진으로 역사를 탐구한 오석근도 눈길을 끈다.

7일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 관람객이 불레베즈웨 시와니 작품 '영혼강림'을 관람하고 있다.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을 벗어나 광주 전시장 4곳은 장소성이 더 특별한 작품으로 변신시킨다. 110여 년 전 선교사 사택을 개조한 문화 공간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은 통유리를 통해 자연광을 받으면 더 멋진 캔버스 회화(비비안 수터)와 미묘한 온습도 변화로 일상물이 움직이거나(모리 요코) 문어를 닮은 로봇이 심해 같은 어둠 속에서 형광빛을 발하는 작품(앤 덕희 조던)은 어린이들도 열광할 작품이다.

국립광주박물관에서는 중국계 캔디스 린이 과거 옹기와 현재 리튬배터리를 소재로 대량생산 시스템 문제를 다룬다. 박물관의 신안해저유물과 호남 대표 서예가 구철우 선생 글씨 덕에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느낌이다. 무각사에서는 중국 대표 설치작가 류젠화의 흑색 도자가 어두운 전시장에서 거울처럼 빛나는 '숙고의 공간'이 명상적이다. 한옥을 개조한 '예술공간 집'에선 가족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인도 영화가 색다르게 다가온다.

이번에는 국가관이 역대 최대인 9곳이 참여해 광주 양림동 등 지역 미술관들이 손님맞이에 들떴다. 동곡미술관에 마련한 이탈리아관은 수조 안에서 물고기처럼 움직이는 작가가 등장하는 수중 퍼포먼스 등으로 관람객을 깜짝 놀라게 했다. 올해 수교 60주년을 맞은 캐나다도 국내 최초, 최대 규모 이누이트 예술을 이강하미술관에서 펼쳤다.

[광주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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